'슈퍼 청기와주유소'를 막는 것들[우보세]

우경희 기자
2022.02.15 05:11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청기와주유소 방송뉴스 캡쳐/사진=머니투데이DB

우리나라 첫 '주유소'는 어딜까. 고종황제의 어차가 1903년에 들어왔다니 아마 고궁 어딘가에 있었을텐데, 기록을 찾기 쉽지 않다. 그럼 최초의 '현대식 주유소'는 어딜까. 이건 기록이 있다. 1969년 홍익대 근처에 문을 연 '청기와주유소'다. SK에너지(당시 유공)가 지어 40여년 운영하다가 지금은 문을 닫고 지명만 남았다.

청기와주유소는 이름 그대로 푸른 기와를 얹은 격조있는 건물이었다. 아무리 봐도 청와대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이런게 허락됐다는 점만 봐도 청기와주유소의 위상은 특별했다. 시설은 당연히 국제적으로도 최신식이었고 면적도 어마어마했다.

위치도 심상찮다. 1960년 문을 연 김포공항을 향해 도시를 빠져나가는 서교동 길목이었다. 차를 몰고 김포공항 가는 '방귀 깨나 뀌는' 사람이라면 청기와주유소에 들르는게 순서였다. 반대로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인들도 만나게 되는 서울의 얼굴이었다.

청기와주유소는 현대식 주유소의 원조일 뿐만 아니라 복합스테이션의 원조다. 주유소 안에 식당이 운영됐고, 렌터카 서비스도 제공했다. 모빌리티서비스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니 청기와주유소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들은 당시로서는 일대 혁신이나 다름없었다.

청기와주유소 이후 꽤 오래 주유소를 운영하면 준재벌 소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시대는 이제 다 지난듯 하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4개 정유사를 합쳐 전국에 1만4000개가 넘었던 주유소는 2020년엔 채 1만개가 안 되는 9992개에 그친다. 망해서 방치되는 흉물 주유소가 도심 변두리에 숱하다. 전기차와 수소차 확대는 주유소 몰락을 가속화한다.

한국을 '기업 규제공화국'이라고 하는데, 알고보면 주유소야말로 규제의 상징이다. 유류를 취급하는데다 우리 곁에서 운영된 역사가 50년을 넘기다 보니 규제가 켜켜이 쌓였다. 2016년에 주유소협회 조사를 보면 주유소 신규 설치 관련 규제만 52개 항목이 넘는다. 운영 규제를 합하면 백개가 훌쩍 넘는 '규제지옥'이다.

청기와주유소 이후 50년, 주유소가 다시 복합스테이션의 꿈을 꾼다. 지난주 시흥대로변에 문을 연 SK에너지 박미 슈퍼에너지스테이션이 대표적이다. 전기차 충전기 뿐 아니라 태양광과 연료전지(LNG) 발전설비를 갖춘 첫 주유소다. 소형 발전소나 다름없다. 탈탄소 흐름을 감안하면 청기와주유소급의 새로운 시도다.

VIP들이 모여 축사도 하고 떠들썩한 오픈행사를 했지만 못내 찜찜한건 지어는 놨는데 활용이 안 돼서다. 태양광과 연료전지로 발전을 하는데 이 전기를 주유소에서 팔 수가 없다. 법이 막고 있다. 기껏 만든 전기를 전력거래소에 팔고, 그 전기를 다시 사다가 전기차를 충전하는데 운영효율 면에서는 코미디나 다름없다.

청기와주유소에서 시작된 주유인프라 확산은 자동차 보급확대와 물류혁신, 자동차 산업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그렇다면 태양광과 연료전지가 결합한 제2, 제3의 청기와주유소가 상징하는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 확산은 어떤 새로운 산업의 문을 열어줄까. 3월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탈탄소 친환경이 최우선 국정과제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곧바로 풀어야 할 규제 리스트를 채우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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