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시프트(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대표)·슈퍼사이클(최주선 삼성SDI 대표)·데스밸리(이용욱 SK온 대표)'
최근 국내 배터리 3사 CEO(최고경영자)가 진단한 업계의 분위기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일관된다. 현재의 위기 국면(데스밸리)에서 배터리 대응 능력을 강화해(밸류시프트) 향후 다가올 업황 반전에 대비해야 한다(슈퍼사이클)는 메시지다.
2020년대 초반만 해도 K배터리에 대한 기대감은 남달랐다. '제2의 반도체'라는 수식어까지 붙으며 대표적인 미래 먹거리로 꼽혔다. 이에 국내 배터리 3사 모두 공격적으로 설비투자(CAPEX)를 확대하며 국내는 물론 북미와 유럽, 중국 등에 생산시설을 구축했다. 실제로 최근 5년(2021~2025년)간 3사의 설비투자는 LG에너지솔루션 44조410억원, 삼성SDI 19조486억원, SK온 26조8122억원 등 90조원에 육박한다. 지금쯤이면 수조원대 이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으로 쏟아부은 돈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배터리 3사의 주요 공략 지역인 북미 전기차 시장이 급격히 위축됐고, 중국 기업들이 저가 경쟁력을 앞세우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삼성SDI와 SK온 모두 지난해 연간 기준 영업손실을 냈다. LG에너지솔루션도 AMPC(첨단생산세액공제)를 제외하면 적자였다. 지난해 하반기에는 일부 완성차 기업들이 배터리 계약 취소를 통보하고, 합작공장 청산까지 나서면서 위기론이 증폭됐다.
이런 상황에서 ESS(에너지저장장치)는 국내 배터리 업계에 반전의 기대감을 주고 있다. 미국은 중국산 ESS 배터리에 약 60%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금지 외국기업(PFE) 요건도 올해를 시작으로 점차 강화될 전망이다. 최근 미국 의회에서는 중국산 ESS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되는 등 '노 차이나 존'을 강화하고 있다.
유럽 역시 공공입찰이나 미국 투자자들이 참여하는 ESS 프로젝트에서 중국 기업들을 배제하려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은 IAA(산업가속화법)와 CRMA(핵심원자재법) 등을 발표했다. 두 법안 모두 전략 산업에 필요한 원자재의 역내 공급망을 강화해 유럽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한다.
업계에서는 ESS 시장의 성장이 폭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 신재생에너지 확대에 힘입어서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약 399GWh(기가와트아워)였던 ESS 시장 규모는 2030년 876GWh, 2035년 1232GWh에 달할 전망이다. SNE리서치는 2024년만 해도 2035년 ESS 시장 규모가 현재 전망치의 절반(618GWh) 수준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지금의 위기는 곧 기회로 연결될 수 있다. 전기차용 배터리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에서 ESS 역량까지 갖춘다면 '투 트랙' 전략을 가져갈 수 있어서다. 특히 자율주행을 중심으로 한 전기차 슈퍼사이클(초호황기)이 도래할 경우 배터리 기업은 설비를 조정하며 유연하게 시장에 대응하는게 가능해진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글로벌 에너지나 AI 관련 기업들이 한국을 찾아 배터리 공장을 방문하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다"며 "전기차에서 ESS용으로 생산라인을 전환하는 것에는 비용이 크게 들지 않기 때문에 시장 맞춤형 대응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