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체 없이 수백 개의 제어기와 전선만 얽힌 '와이어카'가 완성차보다 먼저 시험대에 오른다. 여기서 찾아내는 문제점은 차종당 평균 150~200건이다. 수시간에서 수일이 걸리던 차량 부품 해석에도 인공지능(AI)이 투입된다. 시제품을 만든 뒤 문제를 찾아 고치던 자동차 업계의 개발 방식이 만들기 전에 문제를 잡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선행검증을 두 축으로 확대하고 있다. 남양기술연구소 '노바랩(NOVA Lab)'에서는 시제품 차량이 나오기 전 전장시스템과 소프트웨어(SW)를 검증한다. 또한 AI 솔루션을 도입해 차량 부품의 구조·진동·열유동 해석과 최적설계에도 가상검증을 적용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7일 글로벌 뉴스룸을 통해 노바랩의 선행검증 성과를 공개했다. 노바랩의 와이어카는 제어기와 전장 부품, 배선을 실제 차량처럼 연결해 회로·통신·기능·진단을 점검하는 검증 플랫폼이다. 대형 차종의 와이어카에는 제어기와 전장 부품 300~500개, 와이어링 커넥터 약 500개가 연결된다.
현대차그룹은 기존 900㎡였던 검증 공간을 2700㎡로 3배 넓히고 테스트벤치도 7개에서 14개로 늘렸다. 이동식 소형 다이나모미터와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 시뮬레이터를 갖춰 와이어카에서도 실제 주행과 유사한 조건을 구현한다. 신차 한 대를 개발하는 동안 평균 150~200건의 문제점을 찾아 시제품 차량 제작과 양산 전에 개선한다.
선행검증에 투자를 집중하는 이유는 개발 후반에 발견한 문제일수록 고치는 비용이 커지기 때문이다. 차량이 조립된 뒤 오류가 발견되면 부품을 탈거하고 SW를 수정하거나 시제품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전동화·SDV 전환으로 차량 구조가 복잡해진 데다 중국업체와의 신차 출시·가격 경쟁까지 격화하면서 개발비 절감 압박도 커졌다.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원가 경쟁이 심해지면서 제품 개발 단계에서 10원 단위부터 협업 부서와 협상하는 것이 일상인 차량 모델도 있다"고 말했다.
가상검증은 전장·SW를 넘어 부품의 변형과 진동, 열 흐름 같은 물리적 반응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물리 해석은 부품이 열을 받을 때 얼마나 변형되는지, 진동과 하중을 견디는지 등을 계산하는 작업이다. 해석 종류와 모델 규모에 따라 기존 방식으로 한 건을 계산하는 데 수시간에서 수일이 걸린다. 설계 조건과 형상을 바꿔 수십·수백 번 계산하는 과정에서 해석시간이 개발의 병목으로 작용했다.
AI 가상검증 기업 솔버엑스는 현대자동차·현대모비스·현대위아에 기존 계산 결과를 학습한 AI 대체모델과 최적설계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다. 회사에 따르면 학습을 마친 AI 대체모델은 개별 해석을 기존 솔버보다 수백 배 빠르게 수행한다. 학습 데이터를 만들기 위한 초기 계산은 별도로 필요하지만 이후 조건을 바꾸며 반복하는 해석에서 시간 절감 효과가 누적된다.
생성형 설계는 AI가 다양한 형상을 직접 탐색해 엔지니어에게 최적안을 제안한다. 같은 기간 검토할 수 있는 설계안이 기존보다 50배 이상 늘어난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최윤영 솔버엑스 대표는 "국내에서도 기술기업들이 완성차·부품사에 AI 기반 가상검증·시뮬레이션 솔루션을 공급하며 차량 부품의 성능 향상과 원가 절감을 지원하고 있다"며 "국내외 실제 적용 사례가 늘면서 개발기간 단축과 시제품 제작비 절감 효과도 본격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가상검증 전환이 빨라지고 있다. 토요타는 신형 'RAV4' 개발에 SW 플랫폼 '아린(Arene)'을 적용해 주행 상황과 안전기능을 가상환경에서 검증했다. 시놉시스는 차량 전자장치의 설계·통합·시험·검증을 가상화하면 관련 비용을 20~60%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지멘스는 디지털트윈과 AI를 활용해 물리적 시제품을 최소화하는 '제로 프로토타이핑'을 미래 개발 방향으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