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아웃도어 시장을 개척한 패션업계 '대부' 성기학 영원그룹 회장이 창사 50여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창업 후 단 한번의 적자 없이 탄탄한 실적을 기록했고, 20년째 국내 아웃도어 1위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일궈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그 이면엔 친인척을 동원한 문어발식 사업 확장과 자본시장 감시를 피하기 위한 꼼수 경영이란 그늘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3일 "본인과 친족, 임원 등 특수관계인 회사 82개사를 누락해 영원그룹 자산 규모를 대기업 지정 기준인 '5조원 이하'로 의도적으로 축소한 혐의로 성기학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누락 회사에 본인, 딸, 남동생, 조카 등이 소유한 회사 등 계열사임을 모를 수가 없는 회사가 다수 포함돼 있다"며 "2021~2023년 지정자료에서 누락한 회사의 자산 합계액은 총 3조2400억원으로 역대 최대규모 누락 행위이자, 역대 최장기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을 회피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집단에 지정되면 특수관계인에 대해 내부거래 등으로 부당한 이익을 제공할 수 없고, 주요 사항 공시의무가 생기는데 이를 회피하기 위해 성 회장이 의도적으로 허위 자료를 제출했단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성 회장은 2022년까지 지주회사 체제 중심의 5개 주력 계열회사(영원무역홀딩스, 영원무역, 영원아웃도어, 스캇노스아시아, YMSA)만 소속회사 현황에 포함시켜 자료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공정위는 지난 2023년 성 회장이 차녀 성래은 부회장에게 비상장 개인회사인 YMSA 지분 50.01%를 증여한 건 실질적인 '경영 승계' 절차로 파악했다. YMSA는 영원그룹 지주사 영원무역홀딩스 지분 29.09%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이를 통해 YMSA→영원무역홀딩스→영원무역·영원아웃도어 등 핵심 계열사로 이어지는 지배구조가 형성됐다.
YMSA는 증여세 납부를 위해 대구 만촌동 빌딩을 600억원대에 팔았는데, 매수자가 영원무역이어서 계열사를 통한 부당지원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또 승계 시점을 전후에 영원무역홀딩스의 배당 정책을 바꿨고, 성 부회장의 연봉이 대폭 인상한 것에 대해선 증여세 납부를 위해 주주 이익을 희생시켰다는 비판도 나왔다.
노스페이스 국내 사업을 총괄하는 성 회장의 셋째 딸 성가은 부사장은 개인회사 '이케이텍' 소유의 에디션을 노스페이스 매장에서 판매해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공정위 조사 결과 두 딸이 소유한 회사(래이앤코, 이케이텍, 피오컨텐츠)는 영원무역홀딩스, YMSA 등 주력 회사와의 내부거래도 존재했다.
이처럼 성 회장과 그 일가를 둘러싼 논란은 △무분별한 계열사 확장 △공시신고 의무 위반 △내부거래 남용 △편법 승계 의혹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그동안 영원그룹이 대기업집단 지정을 회피하려는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다만 회사 측은 고의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영원 관계자는 "이번 조사 건은 실무 착오가 있었던 사안으로 고의적 은폐나 다른 의도는 없었다"며 "과오를 인지하자마자 곧바로 자진신고했고, 재발방지를 위한 내부 프로세스를 개선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자본시장 정상화를 강조한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정면으로 위배한 행위인 데다, 검찰이 직접 수사에 나선 만큼 향후 영원그룹에 대한 추가 검증과 고강도 제재 리스크가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이번 사태로 브랜드 신뢰도가 손상되면 향후 실적에도 악영향이 우려된다. 2024년 3조5200억원의 매출을 거둔 영원무역은 자전거 브랜드 '스캇(SCOTT)'의 부진으로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절반 수준인 3160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실적 컨세서스는 매출 3조8000억원대, 영업이익 4700억~5000억원으로 추정된다. 룰루레몬, 파타고니아 등 인기 브랜드 OEM(주문자상표부착) 제품 수주가 늘어나면서 실적 반등을 기대하는 국면에서 오너 일가 사법 리스크가 불거졌다.
한편 성 회장은 1974년 당시 27세 나이에 영원무역을 설립했다. 창업 초기엔 해외 브랜드 중개 무역을 시작했다가 점차 OEM 제조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혀왔다. 최근엔 식품, 건축, 의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계열사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