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보는세상]박현정 전 대표를 죽이는 완벽한 방법

김고금평 기자
2015.09.21 03:20

영화 ‘더 헌트’에서 유치원 교사 루카스는 이혼 후 고향으로 내려와 새 여자친구,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꾼다. 어느 날, 한 소녀가 있지도 않은 성추행 얘기를 꺼내면서 루카스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그의 진실은 ‘성추행’이라는 도덕적 이미지에 묻힐 뿐이다. 교사라는 ‘강자’를 상대로 한 소녀라는 ‘약자’의 거짓말은 집단으로 전파될 때 ‘선’으로 미화된다. 약자의 억울함은 곧 진실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팩트의 오류는 거세되기 일쑤다.

그 선한 주인공이 교회에서 눈물과 광기의 시선으로 집단 폭력에 대항하는 마지막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가 17명의 호소문으로 막말과 욕설, 성추행 당사자로 굳어진지 9개월이 지났다. 시작부터 약자의 집단적 피해자 의식은 언론의 동정을 얻기 충분했다. 당사자가 극구 부인하는데도, 거의 모든 언론이 약자의 억울함은 ‘선’일 수 있다는 전제로 앞다퉈 보도에 나섰다.

그런데 경찰이 수사에 들어가자, 사건은 180도 뒤집어졌다. 박 전 대표에 대한 여론이 나빠진데다, 익명 고소자들의 구체적인 정황을 종합하면 경찰 수사에 힘이 실릴 것처럼 보였던 사건은 그러나 맥없이 좌초되고 말았다.

경찰이 피해자 진술과 녹취 자료를 검토했지만,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었을까.

경찰이 물었다. “박 전 대표에게 3시간 동안 막말을 들었다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해달라” 피해자 중 한 명은 “없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기억이 안난다”고 했다. 경찰 수사가 끝난 뒤 이번엔 기자가 물었다. “‘장기팔아라’라고 박 전 대표가 한 말을 언제 들었나” 대답에 나선 한 피해자는 27명 전체회의에서 다 같이 들었다며 “그때 막말을 처음했다”고 말했다. ‘그때’가 언제냐고 묻자, 그는 “막말을 계속 들어 일상이 되면 시점이 헷갈린다”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대표가 부임하고 첫 막말인데 기억이 안나느냐고 재차 묻자, 그는 “부임하고 1년 사이”라고 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막말이라면 그 충격이 제법 작지 않을테고, 이 피해자는 특히 ‘장기 팔아라’란 막말만 들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시점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을까.

성추행 문제는 거의 이해불가 수준이다. 2013년 예술의전당 직원과 함께 한 회식 자리에서 전당 쪽 직원은 기억도 못하는 성추행 사건, 그것도 1년이 지나서 성추행 당했다는 남자 직원은 경찰 수사를 앞두고 자살 소동을 벌였다. 서울시향의 한 관계자는 “경찰 수사가 엉터리”라는 말까지 했다.

경찰의 무혐의에도 박 전 대표는 여전히 ‘막말’과 ‘성추행’의 당사자다. 아직 완전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이 주는 무서운 위력은 팩트보다 더 중요한 건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팩트는 정정되지만, 이미지는 회복되기 어렵다. 사람들은 정정된 팩트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훼손된 이미지만 기억한다.

서울시향 문제는 확대경으로 보면, 정명훈 예술감독과 박현정 전 대표의 대립 구도가 그 발단이다. 이 과정에서 정 감독은 팩트에 오류가 발견됐지만, 그를 수식하는 훼손된 이미지는 없다. 반면, 박 전 대표는 팩트가 정정되고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불결하고 더러운 치욕의 이미지를 통째로 떠안았다.

서울시향이 최근 10년 만에 노조를 설립했다. 박 전 대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노조는 그 취지를 ‘건강한 소통창구’라고 했는데, 더 단단해진 결속력이 만드는 ‘건강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여전히 물음표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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