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부작용 없는 '좀비기업 솎아내기'

지영한 부장
2015.11.16 17:45

다 어렵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매년 올해 감기가 제일 지독하고, 올해 경기가 제일 좋지 않다는 말을 한 번도 안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죽었나요? 안 죽었잖아. ”

영화 ‘베테랑’에서 밀린 임금 420만원 때문에 생활이 어렵다고 호소한 화물기사(전웅인 분)에게 재벌가 3세 조태오(유아인 분)가 빈정거리며 내뱉은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기업들은 경기가 늘 어렵고 ‘위기’ 상황이라고 말해왔다. 아마도 70~80년대 고도 성장세가 꺾이고, 단군 이래 최대 경제 재앙인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2008년 금융위기를 연거푸 겪으면서 ‘위기’란 말이 자연스레 기업에 체화된 듯 싶다.

IMF 땐 삼성그룹마저 위태로웠다. 1997년말 삼성전자는 반도체 투자를 위한 외화부채를 망라해 차입금이 13조원에 달했다. 환평가 손실, 해외사업 손실 등으로 전체 부실이 6조원을 기록했고, 자본은 거의 잠식상태였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그대로 두면 2~3년 내 회사가 망할 수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위기가 반복되면서 재계에선 ‘거안사위(居安思危)’란 사자성어가 유행했다. 진나라 충신 위강(威强)이 왕 도공(悼公)에게 말하길 “폐하께서는 생활이 편안하면 위험을 생각하고(居安思危·거안사위), 그렇게 하면 대비를 하게 되고(思則有備·사즉유비) 대비를 하면 화를 면한다(有備則無患·유비즉무한)는 이치를 받아들이시라”고 조언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사실 ‘위기’는 예고없이 들이 닥쳤다. 반도체호황, 엔고, 증시활황에 취해 IMF 사태를 눈뜨고 당했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2008년 금융위기도 갑작스레 맞았다. 지금도 해외 동향이 심상치 않다. 중국 경기의 빠른 ‘감속’으로 글로벌 수요 부진이 극심하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임박하면서 신흥국 불안은 고조되고 있다.

조금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경제팀에 ‘위기’와 관련해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한 베테랑들이 많다는 점이다. 금융당국만 보자. IMF 사태와 금융위기 당시 최전방에서 전투를 벌였던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물론, IMF 시절 이헌재 전 부총리를 도왔던 이성규(유암코 사장), 서근우(신용보증기금 이사장) 등 구조조정 전문가들이 금융당국 주변에 포진해 있다. 또한 한국의 ‘위기’ 가능성이 ‘기우’라고들 하지만, 금융당국은 수면 아래 오리발처럼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느라 오래전부터 분주한 게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기업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잡음이 나왔다.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강제합병설이 나오면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이 바람직하느냔 주장이 그 것이다. 정부는 부인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IMF 당시 대기업 ‘빅딜’을 연상했다. 시장 논리보다 정치권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했던 당시 빅딜은 실패로 끝났다. 삼성그룹과 대우그룹의 불발된 자동차·가전 빅딜, 현대그룹과 LG그룹의 반도체 빅딜은 두고두고 후유증만 남겼다. 당시 빅딜에 관여했던 이헌재 전 부총리는 “시장에 정치가 개입하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고백했다. 또 "기업간 거래는 기업에 맡겨야지, 정부가 나서면 꼭 뒤틀리고 어긋나게 된다"고도 했다.

미드(미국드라마) ‘워킹데드’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좀비들은 죽은 시체는 건드리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있는 사람만 공격한다. 물린 사람은 다시 좀비가 되어 살아있는 사람을 물어 세상은 ‘좀비천국’으로 변해간다. 파멸의 악순환이다. 근래 중국 수요 부진 여파로 중견·중소기업까지 좀비기업이 크게 확산되고 있다. ‘워킹데드’의 교훈은 단순하다. 좀비의 숨통을 끊지 않으면 좀비세상이 된다는 것. 그렇다면 좀비기업은 누가 솎아 내야할까. 당연히 시장과 은행의 몫이다. 시장과 채권은행 중심의 ‘속도감’ 있는 구조조정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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