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고대 로마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노예가 큰 소리로 위의 말을 외치도록 해 자신도 언젠가는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권력과 부가 넘쳐나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될 터이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상기하는 것이 과연 겸손한 마음을 불러일으킬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거나 스스로의 죽음을 생각하면 욕심이 줄어들까. 심리학은 이에 대해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지방법원 판사 22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에서 매춘으로 기소된 피고에 대해 보석 허가를 내주면서 보석금을 책정하도록 했다. 그런데 피험자 중 절반은 사전에 ‘언젠가 자신도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느낌을 묻는 설문에 응답한 후 보석에 대한 판단을 내린 반면 나머지 절반은 그런 조건이 없이 바로 판단을 내렸다. 그 결과 사전에 죽음을 연상한 절반은 그렇지 않은 피험자들보다 평균 9배나 높은 보석금(455달러 대 50달러)을 책정했다. 70여명의 대학생이 참여한 또 다른 유명한 실험에서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 매운 소스를 얼마나 할당할지를 정하도록 했다. 역시 사전에 자신의 죽음을 연상하는 과정을 거친 절반의 피험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매운 소스를 타인에게 할당했다.
죽음을 연상한 후 보석금을 더 높게 책정하거나 매운 소스를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먹게 하는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공포관리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 따르면 죽음의 불가피함에 대한 자각은 실존적 공포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부정하는 방편으로 국가나 종교와 같이 초월적인 것에 집착하거나 자신과 유사하고 가까운 사람에 집중하며 외부인에겐 더 공격적이게 만든다고 한다. 요컨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의 마음이 안으로 회귀하도록 만들어 타인에 대한 관용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공포가 타인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는 설명은 복잡하게 얽힌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미디어는 죽음과 그에 수반되는 공포를 증폭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매일 미디어에서 쏟아져나오는 각종 사건·사고·재난에 대한 보도를 접하면서 늘 죽음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언제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포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삶의 모든 순간은 생존의 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로 탈바꿈한다. 공부를 해도, 장사를 해도, 직장을 다녀도 모든 게 사느냐 죽느냐의 경쟁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관용은 사치일 뿐이다. 그렇게 나와 내 가족 혹은 가까운 사람들만을 아끼고 외부인은 철저히 배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더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 갈수록 심해지는 정치적 대립, 빈익빈부익부 현상, 교육현장에서의 폭력과 왕따, 높아만 가는 자살률과 증오범죄율은 우리가 골목의 끝을 향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일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호 침몰로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을 잃은 이웃의 비극에 많은 사람이 그토록 냉담했던 것도, 우리 정치가 이토록 왜곡되고 뒤틀린 이유도,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서로를 저주하며 다투는 것도 어쩌면 사회에 만연한 공포와 불안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와 불안을 줄이는 방법을 깊이 모색해야만 한다.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상생을 모색할 여유를 가질 수 없고 공존 없이는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