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서희가 살아온다 한들

유희석 기자
2017.11.29 03:03
지난 9일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br>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FPBBNews=뉴스1

한반도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두고 중국이 보인 강압적 태도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 한국 외교를 보면서, 1000년 전 동북아 외교역사의 한 획을 그은 고려의 외교가 서희가 떠올랐다. 서희는 성종 12년(993년) 거란이 수십만 병력을 이끌고 침공하자, 직접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군사를 물리고 강동 6주도 얻어냈다. '말'로써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서희의 뛰어난 언변만으로 거란과의 협상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그보다는 거란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서희는 그럴싸한 명분을 줬을 뿐이다. 서희의 뒤에는 비록 대국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무시할 수 없는 고려의 국력이 있었다. 거란은 고려와 싸워 이길 수 없거나, 이기더라도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걸 알았음이 분명하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25년 후 강감찬 장군이 귀주(현재의 평안북도 구성군 일대)에서 거란군 10만명을 몰살한 것으로 이를 증명했다.

우리 외교가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건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를 얕본다는 방증일 수 있다. '촛불'과 '태극기'로 분열된 국론,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 무너진 기초질서 등 우리의 약점을 '적'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국력이 약화한 상황에서 서희가 다시 살아온다 한들 당시와 같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현재 동북아 외교지형을 보자. 시진핑 국가주석이 1인 권력을 공고히 한 중국은 막강한 국력을 앞세워 주변국으로 손을 뻗치고 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자국 이기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일본은 호시탐탐 군사대국화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도 계속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앞날은 더욱 불안해졌다.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건 외교기술이 아니라 결국 힘이다. 얕보이지 않고 우리의 주권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더 단합되고, 혁신적으로 변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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