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 '약속'만 남발하는 정부

지영호 기자
2019.05.15 04:41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국내 1호 동남아 박사학위를 받은 한 노(老)교수의 최근 인터뷰가 시쳇말로 뼈를 때렸다. 끓는 속도만큼이나 급속히 식는 냄비근성이 단면처럼 드러났다. 그는 “우리는 고관대작 불러서 꽹과리 치고 사진 찍으면 끝”이라며 “뭐든 다 해줄 것처럼 약속해놓고 정작 지키질 않는다”고 일갈했다.

2008년 무렵, 당시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 표기를 위해 한글을 문자로 사용한다는 소식에 국내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대서특필했다.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표 사례로 여러 차례 소개됐다. 정부도 장단을 맞췄다. 한글 사용과 한글교사 양성에 대한 MOU(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이 소수민족 지원을 공언했다. ‘한글날’이 되자 이명박 대통령은 세계 각국에 한글을 가르치는 ‘세종학당’을 2015년까지 500곳 설립하겠다고 했다.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지원 약속은 끊긴 지 오래다. 한글을 가르치는 한국인 교사가 1명도 없다. 세종학당은 지난해 기준 170여곳에서 멈췄다. 한글의 세계화는 구호에 그쳤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노교수는 “서울시장, 대통령까지 나서 팔만대장경을 복사해준다, 문화원 건립해준다, 국가적 약속을 해놓고 하나도 안 지켰다”고 울분을 토했다.

정부를 믿었다가 기운 빠진 사례는 경제로 눈을 돌려도 찾을 수 있다. 원격재활 의료기기 ‘라파엘 글러브’를 생산하는 네오펙트는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극찬을 받았다. 제품은 ‘문재인 글러브’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문 대통령은 “첨단 의료기기가 신속히 시장에 출시될 수 있도록 규제혁신을 약속한다”고 했다. 하지만 원격의료를 금지한 의료법에 묶여 제한적인 사업만 한다.

2003년부터 초경량 복합소재 연료탱크인 '타입4'의 개발에 매달려 온 일진복합소재는 최근 걱정이 많다. 추가경정예산안에 친환경차 지원금 2100억원 등 수소전기차 활성화 항목이 포함됐지만 과거처럼 헛심(?)만 쓸까 싶어서다. 이 회사는 정부의 수소전기차 활성화 정책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가 로드맵대로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도 할 말은 있다. 약속의 상당수가 국회 동의를 거쳐야 하는 내용이다. 여야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추경 논의를 시작도 못했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서로 물고 뜯다가도 국익에 도움이 되면 일치단결한다.

그래도 책임의 무게는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에 실린다. 가뜩이나 '계획만 앞선다'는 지적이 많다. 자칫하면 문 정부의 '바이오헬스'와 '수소경제' 활성화가 한글의 세계화처럼 꽹과리 치고 사진만 찍다 끝날지도 모른다. 철저한 사후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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