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가을 한 '아버지'를 만났다. 아홉살 난 아들의 손을 잡고 방문한 집 근처 도서관에서다. 서대문독립공원 내에 위치한 '이진아기념도서관'. 사람 이름이 들어간 것이 특이했다. 그래서 자그마한 동네 도서관이거니 했다. 막상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지하1층, 지상4층 연면적 2758㎡(836평) 규모의 현대식 건물에 다양한 열람실과 문화활동 공간, 어린이 놀이방 등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네" 놀라며 건물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맞은 편 벽면에 붙은 동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으로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 도서관이 건립되었습니다" 동판엔 이 도서관이 만들어지기까지 사연이 한편의 시처럼 기록돼 있었다.
누군지 궁금했다. 주인공은 국내 중소 의류수출업체인 현진어패럴의 이상철 대표였다. 딸 이진아 씨가 2003년 미국 어학연수 중 23세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뜨자, 유독 책을 좋아했던 딸을 기리기 위해 2005년 50억 원을 도서관 건립비로 지원했다고 한다. 거액을 기증하면서 이 대표는 "도서관에 딸의 이름을 붙여달라"는 딱 한가지만을 요청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지어진 이 도서관은 주민들의 사랑 속에 수많은 아이들의 배움터로 자리잡았다. 모범적인 운영으로 상도 여러차례 받았다. 매년 약 60만 명 이상이 이곳을 이용한다고 한다. 우리 가족도 그 사랑의 수혜자인 셈이다.
# 다른 아버지가 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24)의 아버지다. 손 씨는 아동 성착취물 배포 혐의로 1년6개월 형을 받았고 지난 4월27일 형기를 채웠다. 하지만 풀려나지 못했다. 지난해 4월 미국 법무부로부터 온 손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 요청과 관련해 우리 법무부가 중복 처벌에 해당하지 않는 '국제자금세탁'에 대한 범죄인 인도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국연방 대배심은 앞서 2018년 손씨를 아동 음란물 배포 등 6개 죄명, 9개 혐의로 기소한 바 있다.
이때 손씨 아버지가 등장했다. 손씨의 부친은 5월3일 송환에 대비한 구속적부심사가 기각되자 다음날 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자신의 이혼 후 아들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언급하면서 미국에서 다시 교도소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은 본인과 가족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여죄를 한국에서 받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같은 취지의 탄원서를 범죄인 인도 심사를 맡은 서울고등법원 형사20부에도 제출했다. 그리고 최후의 카드까지 꺼냈다. 서울중앙지검에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혐의로 아들 손씨를 고소한 것이다. 미국이 문제삼은 혐의를 우리 검찰이 수사하게 해 송환을 막으려는 시도다. 하지만 정부는 법원의 범죄인 인도심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라 송환 절차를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이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반면, 손정우 아버지의 호소는 호의적인 반응 얻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딸에 대한 그리움을 사회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승화시킨 쪽과 수많은 피해자들을 뒤로하고 자신의 아들만을 생각하고 있는 손씨 부친이 같을 수 없다. 켜켜이 쌓인 잘못과 실수가 한번의 뉘우침과 호소로 씻기길 기대하기도 무리다.
그럼에도 손씨 부친의 행동을 마냥 비판만 하기 어려운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자식을 지키려는 아버지, 부모의 마음이 같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더 엄한 처벌을 내려야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서울 고법은 지난달 19일에 이어 이달 16일 한 번 더 심문기일을 열고 손씨에 대한 미국 인도 심문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늦어도 이달 27일까지는 손씨에 대한 미국 인도 여부가 결정된다. 손씨에 대한 인도 심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이번 주말 아이와 함께 가까운 야외라도 한번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