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마중물의 한계

임상연 미래산업부장
2021.09.01 03:45

스타트업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기업)은 단순히 개별 기업의 성공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스타트업 생태계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스타트업이 유니콘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창업-투자-성장-회수로 이어지는 선순환 생태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니콘을 많이 배출한다는 것은 그만큼 스타트업 생태계의 역동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미국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트의 글로벌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해 발표한 '국가별 유니콘 배출 및 투자생태계 현황' 보고서는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현실이 어떤지 잘 보여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C0VID-19) 악재에도 올 1~7월 전세계적으로 291개 스타트업이 새롭게 유니콘으로 등극했다. 국가별로는 미국이 169개사로 가장 많았고 중국 26개사, 인도와 이스라엘 12개사, 영국 7개사 순이다. 반면 한국에서 유니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스타트업은 신선식품 e커머스 '마켓컬리'를 운영하는 컬리 단 1곳에 그쳤다.

올해 새로 등극한 컬리를 포함한 한국 유니콘은 모두 11개사로 10위에 올랐다. 하지만 주요 국가들이 핀테크(금융기술), 인터넷 소프트웨어, 전자상거래, AI(인공지능), 헬스케어 등 미래 유망산업 5개 분야에서 다수의 유니콘을 배출한 것과 달리 국내는 비유망 분야에 편중됐다. 특히 AI와 인터넷 소프트웨어 분야는 전무하다. 정부 주도로 '제2 벤처붐'이 달아오르지만 스타트업의 성장은 더디고, 그나마 산업분야도 제한적이다. 한마디로 갈 길이 아직 멀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유니콘이 좀처럼 나오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벤처투자·회수시장이 협소하고 경직됐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에 대한 글로벌 투자현황(2018~2020년)을 살펴보면 한국은 1억달러 이상 대형 투자건수가 14건으로 전체의 1%에도 못 미친다. 단계별 투자도 한국은 상대적으로 스타트업의 초기 투자비중이 큰 반면 성장기 스타트업의 스케일업에 필수인 중후기 투자비중은 작은 게 현실이다. 투자회수 단계인 '엑시트'는 스타트업 강국의 경우 인수·합병(82.8%)을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한국은 그 비중이 52.9%에 그친다. 벤처캐피탈(VC)로 국한하면 이 비중은 10% 이하로 급격히 떨어진다.

정부가 모태펀드 등을 통해 마중물을 쏟아붓지만 마중물만으론 유니콘이 자라는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연기금이나 대기업의 기업형 벤처캐피탈(CVC) 등 민간 모험자본에서 대규모 투자가 뒤따라주지 않는 한 유니콘의 탄생은 물론 스타트업의 스케일업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투자분석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올 상반기 미국의 스타트업 투자규모는 1500억달러(약 172조8000억원)를 넘어섰다. 역대 가장 높았던 지난해 투자액을 뛰어넘는 규모다. 스타트업 투자규모가 급격히 커진 것은 연기금, 국부펀드 등 비전통 벤처투자자의 참여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들 비전통 벤처투자자의 투자규모가 전체의 4분의3을 차지했다. 올해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은 유니콘을 배출한 것도 VC뿐만 아니라 다른 큰손들까지 스타트업 투자에 적극 나선 결과다.

국내 벤처투자·회수시장에도 이 같은 변화와 활력이 필요하다. 연기금과 민간 모험자본이 스타트업 생태계에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안전자산에 치우친 연기금의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CVC 시장이 활성화하도록 정부가 규제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 지금처럼 마중물만 붓는 방식으로는 유니콘은커녕 어렵게 지핀 제2벤처붐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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