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과 사이가 안좋은 친구가 있다. 1년 전쯤 그를 만났을 때는 석달째 부인과 말을 하지 않고 지낸다고 했다. 최근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요즘은 간단한 대화는 한다고 했다. 관계가 나아진 비결을 물으니 공동의 적이 생겨서란다. 툭하면 도발을 하는 중2병 아들을 상대하려면 부부가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공동의 적이라고 표현했지만 부부에게는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최근엔 뜻하지 않게 부부사이까지 이어주고 있다.
이런 훈훈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적의 존재가 항상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적은 싸우던 이들도 단결하게 한다. 역사를 봐도 으르렁대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가 연합해 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라는 막강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적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대항해 뭉쳤다. 1, 2차세계대전 때 서로 총을 겨눴던 나라들이 서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서 협력한 것은 공산주의라는 적의 확산을 저지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역으로 통합과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면, 적을 만들어내고 그 적의 악마성을 과장해야 한다. 이건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적인 인간관계부터 국내 정치 현상, 대외관계를 분석할 때 유용하다.
술자리에서, 흡연장소에서 우리가 흔히 하는 직장 선후배에 대한 뒷담화는 진짜로 그 선후배가 못돼서 그렇다기보다는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끼리 동지의식을 키우고 응집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일 확률이 높다. 지엽적인 단결과 통합을 위해 그 자리에 없는 제3자의 악마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북한을 악마화한 건 내부 통합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박정희는 반공으로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민주주의 중단'이나 다름없었던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 찬성률이 91.5%에 달했던 건 북한의 위협에 대한 긴장감을 극대화한 상황에서 투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북한과의 관계를 빠르게 개선해야 했다. 역시 공동의 적을 만드는 게 목표 실현에 효과적이었다. 남북한에 공통된 시련을 준 일본을 적대시함으로써 남북한의 동질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혐일은 곧 남북 공동의 정체성을 찾는 수단이 됐다.
적은 '정치적인 나'를 존재하게 한다. 적어도 정치에서만큼은 '믿음이 없으면 설수 없다(無信不立)'가 아니라 '적이 없으면 설 수 없다(無敵不立)'가 맞다. 마키아벨리는 만약 공화국의 외부에 적이 없다면 국내에서 적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이번 정부에서 이뤄진 MB·박근혜정권 부역자에 대한 단죄, 검찰개혁, 언론개혁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적폐청산' 흐름은 특정 영역을 고립시키고 악마화해 그밖의 구성원들을 통합시키고 지지를 얻는 정치행위의 전범을 보여준다. 진짜 그 대상에 문제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에서인지 간파하려면 같은 기준을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그동안 이뤄진 일련의 공격들은 '내로남불'이라는 검증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인간은 쉽게 '절대적인 이익'이 아니라 '경쟁집단보다 우월한 것'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적에 대한 과장된 분노에 더 많이 동조할수록 희생되는 것은 구성원들의 이익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행해진 북한에 대한 지나친 악마화는 노동, 인권탄압에 대한 불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번 정부에서는 검찰, 언론 적폐 청산으로 지지자들을 통합시킬 경우 집값 폭등과 일자리 감소 등 경제 영역에서의 불만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말했다. "미움은 얼마나 멋진 것인가." 집단감정은 '우러나오지' 않고, '파종되고 키워지는' 것이다.
주변에서 뒷담화를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가깝게 지낼 사람이 못된다. 내가 없는 곳에서는 내가 안줏거리가 돼 '씹힐' 게 뻔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내부에서 적을 찾는 정치행위의 물결에 내가 그 적이 돼 익사하기는 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