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2003년작 영화 황산벌은 '거시기'와 '머시기'의 한판 승부다.
계백 장군으로 분한 배우 박중훈의 "머시기할 때까지 거시기 해불자"라는 말의 뉘앙스를 백제군은 알지만, 신라군은 몰라 이를 해독하는 데 골머리를 앓는 장면은 큰 웃음을 자아낸다.
이런 부정확한 대명사는 영화의 소재로서는 좋은데 중요한 의사 결정의 판단 기준이 되는 법률이나 규약에 포함될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법은 그 무엇보다 명확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제20대 대통령 후보 선정과정에서 특별당규의 문구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만 봐도 알 수 있다.
쟁점은 민주당의 특별 당규 59조 '경선 과정에서 후보자가 사퇴하는 때에는 해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무효로 처리한다'는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모아진다. 중도 사퇴 이전의 투표까지 무효로 하느냐? 사퇴 이후의 표만 무효로 하느냐를 두고 해석이 엇갈린다. 당규가 '명확성의 원칙'(明確性의 原則) 을 지키지 못한 탓이다.
여기서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에 대해 논하거나 현실정치와 관련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니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시는 분들의 시비는 사양한다.
3개월 앞으로 다가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바라 보는 재계의 우려를 전하기 위한 목적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와 처벌의 엄중함은 모두가 안다. 문제는 이런 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가 정확히 어떤 때인지에 대한 법의 명확성이 부족한 채 시행될 경우 갈등과 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재계는 꾸준히 △중대재해 정의 △의무주체 범위 △준수의무 내용 등 법상 모호한 규정들은 명확히 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시행령은 여전히 △안전보건의무 △관계법령 등을 포괄적으로 규정해 기업들은 법을 어떻게 준수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다.
시행령에 규정된 경영책임자의 안전 및 보건 확보의무를 법 시행일인 내년 1월 27일까지 준수 가능한지 의문을 표하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법에서 명확히 정하지 못한 것을 시행령에라도 구체화해 놓을 것이라는 기대는 국무회의가 끝난 후 물건너갔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최근 설문에 따르면 기업 10곳 중 7곳이 안전보건 확보의무 준수가 어려울 것이라며, '의무내용이 불명확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명확성의 원칙(void for vagueness)은 범죄의 구성요건과 그 법적 결과인 형벌을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형법의 법리이다. 녹색불일 때는 건너가도 되고, 빨간불일 때는 멈춰야 하며, 빨간 불에 멈추지 않을 경우 처벌받는다는 명확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중대재해처벌법 속에는 온통 노란불 투성이다.
국민은 어떤 행위가 형법에서 금지되고 그 행위에 대하여 어떤 형벌이 가하여 질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법관의 지나친 자의적인 해석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을 사법부가 통치하는 사회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계는 또 중대재해처벌법 중 가장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사항으로 '고의·중과실이 없는 중대산업재해에 대한 경영책임자 처벌 면책규정 마련'이라고 답변했다. 최선을 다해 법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불의의 사고에까지 경영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과잉금지 위반이 될 수 있다.
이번 민주당 대선 후보 선정 과정에서 봤듯이 법이 해석의 여지를 많이 두면 갈등의 원인이 된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을 3개월 앞둔 지금 시점이라도 재개정을 통해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명확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