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힌 혈이 조금 뚫리려는 모양입니다"
이달 말 전력거래소의 BESS(Battery Energy Storage System, 이하 ESS) 중앙계약시장 입찰을 앞두고 배터리 업계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ESS를 활용한 전력 시장 참여 기업과 물량을 선정하는 이번 입찰 규모는 총 540MW(호남 500MW, 제주 40MW)로 단일 사업 기준 역대 최대다. 2038년까지 23GW 규모의 ESS를 확보한다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지난 2월 확정되자 나온 첫 정부 발주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에도 500MW 이상의 물량을 발주할 예정인 것으로 파악된다.
7년만에 ESS 시장 숨통이 트인 셈이다. ESS 신규 설치량은 매년 줄어 이제는 2018년 대비 15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화재 사고로 안전성 문제가 불거졌고 2020년엔 지원 제도까지 종료되며 국내 ESS 시장은 사실상 마비상태였다. 그러는 사이 태양광 설치가 급증했고 송·배전망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매년 추석 무렵이면 전력 과잉 공급에 따른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을 걱정해야 했다. 다량의 전력을 충전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ESS가 즉효약이었지만 번번히 쓸 수 없는 카드가 됐다. 관련 산업에도 영향이 갔다. 글로벌 시장이 막 움트려던 2017년 세계 ESS 판매 1위였던 한국 배터리 업계는 국내 시장을 잃자 중국에 밀려 2위로 주저앉았다.
여기까지 7년이 걸렸지만 그나마 다행이란게 업계 공통된 목소리다. 먼 길을 돌아온 만큼 운용 경험이 누적돼 안전성과 경제성이 개선됐다. 늘어난 태양광을 소화할 만큼의 송·배전 시설 구축에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단 점을 감안하면 숙성과정을 거친 ESS를 안쓸 이유가 이제는 없단 거다. 공격적으로 ESS 설치를 늘리는 미국과 유럽에서 국산 제품이 대규모로 운용된지 오랜데 한국만 ESS의 '갈라파고스 규제'(국제적 흐름과 단절된 규제)로 더이상 남아있는 것도 괴이하다.
다소 늦었지만 제도 변화도 고무적이다. 이번 입찰에선 비가격 요소인 '국내 산업 기여도' 평가 비중이 올라갔다. 평가 항목엔 국내 생산 여부, 유지·보수 기반, 고용 창출 효과 등이 포함됐다. '잃어버린 7년' 동안 2위로 주저앉은 국내 업계엔 희소식이다. 가격 경쟁력에서 중국에 밀리는 국내 업계로선 해볼만한 싸움이 됐다.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벽을 두텁게 쌓는 게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 마당에 이 역시 일종의 '탈 갈라파고스'로 볼 수 있다.
관건은 어렵게 되돌린 정책 방향의 유지다. 정부는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을 준비중인데 이는 오는 6월 조기 대선 이후 차기 정부에서 확정된다. 늘 정권 교체기마다 에너지 정책도 급변했지만 이번엔 달라야 한다. 막혔던 ESS 혈이 뚫리고, 정권이 바뀌는 현 시점에 세계 최대 배터리 기업인 중국 CATL이 한국에 법인을 냈다. 에너지, 특히 ESS 정책의 분기점에 선 셈이다. 차기 정부의 현명한 선택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