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애플TV+의 판타지 SF시리즈 '어둠의 나날'(SEE)을 봤다. 이 드라마는 재미와 함께 인간감각과 지식, 문명의 본질에 대한 성찰거리를 제공한다. 시대적 배경은 인류가 바이러스로 시력을 잃고 감각에 의존해서 사는 가상의 미래다. 본다는 건 전설로 전해질 뿐 시력이란 단어는 금지어가 된다. 책이 사라지고 문명은 후퇴했으며 사람들은 신화 속에 갇혀 살고 있다. 이 어둠 속에서 시력을 가진 쌍둥이 남매가 태어난다. 앞을 보는 쌍둥이를 해치려는 여왕과 수색대를 피해 도망 다니고 생존을 위해 싸우며 시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계몽의 집을 찾아가는 모험이 시즌1의 주된 이야기다. 드라마 초반에 책이 중요한 매체로 등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쌍둥이는 몰래 책을 보며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한다. 시력을 가진 마을, 계몽의 집엔 도서관과 학습문화가 있다. 제이슨 모모아가 쌍둥이의 의붓아버지로 나오는데 정작 자신은 앞을 보지 못한다. 권력자들은 시력을 마녀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력을 권력화하려는 이중성도 보인다. 드라마에서 시각과 책, 지식과 문명의 관계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시력을 잃은 인류는 촉각, 청각, 후각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나름의 문명을 이루지만 책과 같은 지식을 저장하는 매체가 없었기에 구전과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시력을 가진 쌍둥이는 과거 인류가 축적해놓은 지식에 접근하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꿈꾼다. 쌍둥이가 책으로 학습하는 장면은 지식의 축적과 전승효과를 시사한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지식은 단순 정보전달이 아니라 문명의 유전자 같은 역할을 한다. 농업, 의학, 기술, 철학 등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한 지혜는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존·전수됐다. 책은 지식의 저장고이자 세대와 문명을 이어주는 다리다. 지식이 시공간을 초월해 전승될 수 있었기에 인류는 이전 세대의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른 상황에 직면했다. AI(인공지능)라는 초인간적 매체가 등장해 방대한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AI는 모든 인간에게 '초인적인 시력'을 선사했다. 누구나 방대한 지식을 검색·요약·습득할 수 있고 이전에는 불가능하던 빅데이터 분석도 가능해졌다. 세상이 변했지만 지식과 지혜는 여전히 중요하다. 한편 AI가 생성하는 답변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토대로 하고 그 답변의 질은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깊이에 좌우된다.
드라마를 보면서 문득 헬렌 켈러의 말이 떠올랐다. 불행을 딛고 성공한 헬렌 켈러에게 기자가 물었다. "앞을 못 보는 것보다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헬렌 켈러는 단호히 답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건 눈으로 앞은 보면서도 미래를 보지 못하는 거지요." 생물학적 시력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어둠의 나날' 속 인류는 시력이라는 감각을 되찾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꿈꿨다. 오늘날 초강력 도구, AI를 사용하는 현대인은 과거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혁신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든 지식은 어둠을 밝히고 미래를 여는 강력한 도구 역할을 했으며 AI 시대에도 그러할 것이다. 시각과 시력은 중요하다. 시력은 책을 읽고 지식을 축적하며 문명을 이루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문명발전의 동력은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예측능력이다.
인류는 AI라는 새로운 '지식의 눈'을 얻었지만 AI 기술은 인간의 질문하는 힘, 깊이 있는 통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결합해야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시력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지만 지식과 통찰력은 어둠을 밝히고 앞날을 내다볼 수 있게 해준다. AI를 지식증강과 통찰력의 도구로 잘 활용할 때 인류는 또 한 번 위대한 도약을 이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