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4월30일 하이닉스반도체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미국 마이크론에 메모리사업부문을 매각하는 안을 부결했다. 이사회는 채권단이 매각의 대가로 받기로 한 마이크론 신주가격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됐고 하이닉스의 우발채무가 부풀려졌다고 판단했다. 정부와 채권단의 뜻과 달리 독자생존을 택한 결정이었다.
# SK그룹은 2011년 11월 하이닉스 지분 21.1%를 인수하는 계약을 했고 2012년 2월 대금 3조4267억원을 완납했다. 이후 SK하이닉스는 이천·청주공장의 생산능력을 확충했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과 부대시설에 약 9조4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SK하이닉스는 2028년까지 총 103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계획을 세우고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AI(인공지능) 메모리 중심의 증설·고도화를 추진 중이다.
SK하이닉스는 2025년 상반기에 별도기준 법인세 2조7717억원을 납부하며 국내 1위를 기록했다. 2위 기아(9089억원)의 3배에 가깝다. 23년 전 이사회가 매각안을 통과시켜 마이크론에 회사를 넘겼다면 SK하이닉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거두는 세수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글로벌 메모리업계는 삼성전자, 하이닉스, 마이크론, 인피니언(독일), 엘피다(일본)와 대만 D램기업들이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대규모 설비투자로 공급과잉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경쟁기업이 사라지면 살아남은 기업은 시장을 과점할 수 있었다. 하이닉스는 구조조정과 포트폴리오 재편, 기술·경영의 혁신 등을 통해 결국 생존했다.
반면 인피니언의 경우 메모리사업을 분사한 키몬다가 2009년 파산했다. 엘피다는 2012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같은 해 7월 마이크론에 2000억엔에 매각됐다. 메모리시장은 삼성전자-하이닉스-마이크론 3강 구도로 바뀌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기술혁신과 경영안정화로 HBM시장을 주도했다.
하이닉스의 2001년 매출은 3조원에 불과했고 9403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SK가 인수하기 직전인 2011년 말에는 매출 10조3958억원, 영업이익 3255억원(연결기준)을 기록했다. 지난해 말 SK하이닉스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66조1930억원, 23조4673억원(연결기준)으로 도약했다. 직원 수는 2001년 1만2906명, 2011년 말 1만9601명에서 올해 상반기 3만3625명으로 증가했다.
SK하이닉스 공장이 있는 이천과 청주는 전국에서 드물게 인구가 늘고 있다. 직접고용뿐 아니라 협력업체 수가 많아지고 이들 기업도 채용을 확대하니 사람이 몰린 것이다. SK하이닉스가 2024년 납부한 법인지방소득세는 이천시 1720억원, 청주시 1219억원으로 두 도시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SK하이닉스를 예로 들었지만 삼성, 현대차, LG, HD현대, GS, 포스코, 한화, 두산 등 주요 그룹의 생산기지가 있는 도시들도 다르지 않다. 현대차와 HD현대중공업이 없는 울산,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없는 거제, 삼성전자가 없는 용인·화성·평택을 상상해보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부과 같은 외적 변수는 개별 정부가 통제하거나 방어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내에서 법과 제도를 통해 기업의 부담을 덜고 산업을 진흥하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다투는 반도체특별법은 여전히 국회에 머물러 있고 신중을 기해야 할 노란봉투법과 상법개정안은 '속도전'으로 처리됐다.
SK의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기업은 혁신의 토대이자 고용의 원천이다. 기업이 벌어들이는 돈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세수로 돌아간다. 기업의 '기'를 살리고 '힘'을 내도록 북돋아야 혁신도, 고용도, 경제활성화도 가능하다. 기업의 힘에 기대고 그 힘을 활용해 성공하는 정부를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국익을 지키고 국부를 키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