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권율 장군의 후퇴와 리더의 최소한 자존심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2026.01.29 02:05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2월)16일에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왜적이 다시 (행주산성을) 침범하려고 계획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진을 옮겨 파주로 와서 도원수와 연이어 진을 쳤습니다. 양천 이남의 군사는 충청감사 허욱과 전라병사 선거이인데 또 수원의 독성으로 후퇴해 지키고 있습니다."

1593년 2월25일 '선조실록'에 기록된 류성룡의 급보 내용이다. 행주대첩이 있던 2월12일로부터 4일 후의 상황인데 대패한 왜군이 다시 보복전을 감행한다는 소문에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을 버리고 서울에서 더 먼 북쪽의 파주로 군대를 옮겼다. 또한 한강 남쪽의 양천과 금주산(호암산성)에 주둔하던 충청감사 허욱과 전라병사 선거이까지 수원의 독성으로 후퇴배치했다. 권율 장군의 판단에 따른 결정인데 영의정 류성룡의 생각은 달랐다.

류성룡은 "대개 명나라 군대가 후퇴해 주둔한 뒤 많은 사람이 동요해 질서 없이 모두 후퇴하니 이것은 좋은 계책이 아닌 듯합니다. 신은 거듭 권율을 독려해 행주산성으로 돌아가 지키게 하고 싶었으나"라고 말했다. 이어 "(행주산성이) 목책과 군영의 보루가 이미 불타서 군사들이 의지할 것이 없으므로 부득이 임시로 파주의 뒷산에 머물러 이빈·고언백 등과 함께 고기비늘처럼 이어서 진을 치게 했습니다"라고 했다. 행주산성을 고수하라는 류성룡의 명령에 대해 권율 장군이 "목책과 군영의 보루가 이미 불타서 군사들이 의지할 것이 없으므로"라는 근거를 대면서 부득이 파주 뒷산에 있는 서원 고을의 고대 통치성인 봉서산성으로 후퇴해 진을 칠 수 있도록 요청해서 이뤄진 것이다.

행주산성에서 함락 직전까지 간 악전고투의 경험 때문에 권율 장군이 쫄았던 것은 아닐지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목책과 군영의 보루가 이미 불타서 군사들이 의지할 것이 없으므로"는 핑계에 불과했고 권율 장군의 전체적인 형세파악에 따라 이뤄졌다. 류성룡은 "신이 도원수 김명원과 날마다 사정하면서 매번 (명나라군의) 대장에게 간청해도 결단하려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한 명나라군의 본영은 개성으로 후퇴한 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벽제관 전투의 대승에 취해 하루라는 대규모 단기전을 감행했다가 대패한 왜군이 보복전을 벌이려 벼르고 있었다. 왜군의 반성과 명나라군의 남하가 당분간 없을 것임을 전제로 보복전이 이뤄진다면 조선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낮아진다. 왜군이 하루가 아니라 며칠에 걸쳐 공격하거나 물이 없어 장기전에 취약한 행주산성의 단점을 파악하고 중장기 포위전을 감행한다면 어느 쪽이든 조선군이 승리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행주산성이 아니라 호암산성을 공격해도 마찬가지다.

권율 장군이 후퇴해 진영을 다시 배치한 것은 단지 목책과 군영의 보루가 이미 불타서 군사들이 의지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전체적인 형세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내기 힘든 용기를 또 보여준다. 왜군의 공격에 대해 안전을 최우선으로 뒀다면 임진강을 건너 명나라군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주둔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권율의 조선군은 임진강을 건너지 않았다. 남하를 극구 꺼리던 명나라군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후퇴했지만 그래도 조선군이 최전선에 서 있다는 자존심을 보일 수 있는 곳, 파주의 봉서산성을 택했다.

국가든 기업이든 리더는 끊임없이 결정을 요구받는 경쟁환경에 살고 있으며 그때마다 공격적인 결정만이 정답일 수는 없다.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일보후퇴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때 꼭 필요한 용기 중의 하나가 최소한의 자존심을 설정하는 것이다. 구성원들에겐 참고 견디며 이겨나가야 할 이유가 되고 상대에겐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무언의 힘이다. 파주 봉서산성 아래 전망대에 오르면 북으로는 개성의 송악산까지, 남으로는 서울의 북한산까지 끝내주는 조망이 펼쳐진다. 한번 가볼 만하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