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의 포화가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으로 전이될 때 국가 위기관리 능력은 시험대에 오른다. 에너지 자립도가 낮은 한국에서 석유 수급은 경제의 혈류와 같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은 실효성 있는 '시스템적 대응'과 실효성 없는 '개인적 희생 강요'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정부 정책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실효적 조치는 '정부 비축유 스와프(SWAP)' 제도다. 중동발 원유 도입이 차질을 빚을 때 민간 정유사가 해외에서 대체 물량을 확보하더라도 국내 도착까지는 최장 50일이 소요된다. 정부는 이 도입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국가 비축유를 우선 대여하고 사후에 돌려받는 방식을 택했다. 이를 통해 원유 수급 기간을 10일 이내로 단축하며 산업계의 생산 차질을 정밀하게 방어했다. 데이터와 물류 시스템에 기반한 '유능한 행정'의 전형이다.
반면 '범국가적 에너지 절감 캠페인'은 실효성 측면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주말 세탁기 사용'이나 '샤워 시간 줄이기' 같은 지침은 1980년대식 계도 행정의 재림으로 볼 수 있다. '휴대전화 낮 시간대 충전'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생활양식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질적인 에너지 절감 효과보다 정부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한다는 불신을 키울 수 있다. 거시적인 수급 불안을 미시적인 도덕적 의무감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은 정책적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책 효능감이 국민 신뢰와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국민은 정부가 복잡한 위기를 과학적 시스템으로 해결할 때 안도감을 느끼며 정부를 신뢰한다. 반대로 정부가 명확한 해법 대신 국민의 일상적 불편을 요구할 때 국민은 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에 의문을 품게 된다. 정책 효능감이 낮은 대책이 반복될수록 국정운영의 핵심 동력인 '사회적 신뢰'라는 자본은 고갈되기 마련이다.
국민의 신뢰는 세탁기를 주말에 돌린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예측 가능하게 작동하고 현장의 헌신이 헛된 캠페인에 낭비되지 않을 때 비로소 공고해진다. 정부는 보여주기식 캠페인이 아닌 비축유 스와프와 같은 실전적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데 모든 행정력을 집중해야 한다. 위기일수록 필요한 것은 '계도'가 아니라 '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