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져서는 안될 일이 벌어졌다.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가 장시간 중단되는 파행이 빚어진 것이다. 유권자들은 이미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돼 후보별 득표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에서 투표에 임해야 했다. 일부는 장시간 대기를 할 여유가 되지 않아 투표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단순히 수천 명이 투표에 불편을 겪은 해프닝으로 축소할 일이 아니다. 국민의 기본 권리인 참정권이 침해되고 자유선거 원칙이 훼손됐다. 선거제도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만큼 사후 조치도 이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이뤄져야 한다.
선관위는 행정 과실이라고 주장한다.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투표용지를 전체 선거인 수의 50% 분량만 인쇄해 투표소에 비치했는데 일부 투표소에 예상치를 웃도는 유권자가 몰리면서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투표 참여를 촉진해야 하는 법적 의무를 지닌 선관위가 상당수 유권자의 기권을 전제로 선거행정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자인했다. 기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 셈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투표용지 부족사태로 선거 전체가 무효가 된 전례가 있는데도 경각심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선관위의 안일함을 방증한다.
앞서 선관위는 고위간부 자녀 특혜 채용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북한 해킹 조직에 취약점이 노출됐음에도 국가정보원의 보안 점검이나 통보를 장기간 거부·기피한 사실도 밝혀졌다. 2022년 대선 땐 투표 사무원들이 투표용지를 소쿠리에 담아 옮기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인사 비리와 보안 무방비, 현장 관리 무능이라는 총체적 난국이 '투표용지 부족 사태'라는 기본권 침해 사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선관위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일부에서는 보수 성향 유권자가 많은 지역에 부족 사태가 집중됐다는 점에서 부정선거 의혹까지 제기한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선관위가 선거 공정성에 대한 의심을 자초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선관위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야 하는 헌법기관임에도 스스로 선거제도에 회의를 갖게 하고 사회적 갈등을 키우고 있다. 행정 실패나 무능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는 물론 검경 수사, 부족하면 특검을 통해서라도 각종 제기된 의혹을 규명하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 책임자 문책과 처벌은 물론 조직 대수술에 나서야 한다. 거듭나는 수준의 선관위 개혁만이 선거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