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leet. A war. A man."(함대. 전쟁. 한 사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는 이 짧고 강렬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오디세우스에게 진짜 여정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 시작된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은 거대한 파도와 괴물, 유혹과 배신,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이 그를 기다린다. 이 고대의 이야기가 오늘날 AI 시대를 맞은 한국의 모습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한국도 이미 하나의 거대한 전쟁을 치렀다. 바로 반도체 전쟁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메모리 경쟁력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제조업 강국으로 성장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곧바로 이타카에 도착한 것이 아니듯, 한국도 반도체 강국이라는 현재의 성공만으로 AI 시대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더 긴 항해의 시작이다.
오디세우스 앞에 펼쳐진 바다는 끊임없이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온다. 한국이 마주한 바다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은 반도체에서 AI, 양자기술, 로봇과 피지컬 AI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압도적인 AI 모델과 소프트웨어, 반도체 설계와 플랫폼 경쟁력을 바탕으로, 중국 역시 국가 차원의 대규모 투자와 인재, 거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질주 하고 있다.
이제 고래싸움 속에 있는 한국의 AI 정책은 단순한 산업정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산업·과학기술·경제·안보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는 '전략경제(Strategic Economy)'의 관점이 필요하다. AI 경쟁은 더 이상 특정 산업의 경쟁이 아니다. 국가의 산업구조와 에너지, 인프라, 안보와 외교까지 연결된 국가 경쟁력의 총체적인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에게 배가 없었다면 항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AI 시대 한국의 배는 무엇일까. 그동안은 HBM 으로 대표되는 메모리 반도체 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결국 AI, 반도체 외에 데이터, 전력, 클라우드, 인재 등이 한국의 배 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이들을 각각의 산업정책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이 모든 요소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배의 부품이 아니라 배 전체의 항해 능력이다.
오디세우스의 항해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사이렌이다.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한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고 선원들의 귀를 막게 함으로써 유혹을 이겨낸다. AI 정책에도 사이렌의 노래가 있다. 'GPU만 많이 확보하면 된다'거나 '우리도 챗GPT와 같은 거대언어모델 하나를 만들면 된다'는 식이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국가 AI 전략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정책이 특정 기술이나 숫자의 경쟁에 매몰되면 오히려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AI 시대에 가장 위험한 것은 기술의 유행에 휩쓸리는 것이다.
앞으로 2~3년, 한국의 항로를 결정해야 한다. 지금 한국에는 중요한 기회가 주어졌다. 반도체 호황이 이어지는 동안 늘어나는 수출과 세수를 단순히 현재의 성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을 미래를 준비하는 투자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AI 컴퓨팅을 확보하고, 전력 인프라를 확충하고, 데이터를 국가 경쟁력의 자산으로 만들고, 인재를 키우고, AI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연결해야 한다. 정부가 모든 것을 직접 하려 하기보다 기업과 대학, 연구소, 스타트업이 함께 움직일 수 있는 항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AI 3대 강국' 이라는 목적지가 있다고 해서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항로가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반도체 기업, 인재, 네트워크와 산업 인프라 같은 좋은 배를 가지고 있다.
AI 시대에는 배 크기나 성능보다 누가 가장 정확한 항로를 선택하고, 거친 파도 속에서도 끝까지 항해할 수 있느냐의 경쟁이다. 함대(A fleet )는 이미 있다. 항로의 최종 목적지는 AI를 통해 대한민국의 다음 30년을 설계하는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귀환처럼(A man) AI 시대 한국의 항해(A war) 도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