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와 등대[투데이窓/김중식]

김중식 시인
2026.08.19 02:00

여배우 조상 친일논란 자랑과 무지 때문
정치가 친일파,빨갱이로 갈라 역사전쟁
분열의 선 긋지못하면 미래는 재앙될 것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한국 초기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납북시인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1939) 전문이다. 나비는 자신이 무엇과 맞서고 있는지 몰랐다. 모르기 때문에 용감해졌다. 무우밭인가 싶어서 가본다. 물방울 하나가 튀었을 뿐인데 두려움이 몰려온다. 탈진 상태로 되돌아온다. 거기가 꽃밭이 아니라 바다일 게 뭐람? 서글프고 시리다.

증조부가 친일파라는 여배우가 그 나비 같다. 그녀의 죄는 '자랑과 무지(無知)'로 요약되는 듯하다. "냉장고가 5대"라는 자랑은 '공주'답다. "안 먹어서 (식재료가) 매일 썩는다"는 말이 사람들 속을 뒤집어놓았다. 조상 자랑이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말이 태풍이 되어 바닷속을 뒤집어놓았다.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자랑하다 자기가 하지 않은 일 때문에 벌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가 그녀의 자랑스런 가족서사를 비극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또다른 잘못은 무지다. 그의 조부모도 부모도 그에게 물의 깊이를 가르쳐준 적이 없었던 듯하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명문가를 멸문지화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가족 전체가 몰랐던 것일까.

그녀의 말들이 공정과 정의라는 시대정신을 잘못 건드렸다, 그럼에도 어떻게 2026년 사건이 1910년대 증조부의 행적과 순식간에 겹쳐지는가. 대한민국을 둘러싼 바다에는 파도처럼 되돌아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청산'이라는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는데, 그것이 '역사전쟁'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조장한다. 제왕적 대통령제 하 양당제 시스템은 제로섬 게임판이다. '잘하기 경쟁' 대신 상대를 악마화해서 주저앉히는 반(反)정치가 판친다.

정치인이 체급을 올릴 때, 정당이 큰 선거를 치를 때 공동체의 균열(cleavage)을 양극화시킨다. '멸콩' 대 '노 재팬', '좌빨'(색깔론) 대 '토왜'(적폐론) 프레임을 확대재생산한다. 대한민국은 '두 개의 나라'에서 '두 개의 국민'이 국가 정통성을 독점하려는 거대한 역사전쟁터가 됐다.

대한민국을 홍해처럼 둘로 가르는 심연 양편에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각각 친일파와 빨갱이라는 역사적 원죄론이 자리하고 있다. 민족정체성과 국가정체성 확립이라는 두 과제를 안고 출범한 대한민국에서 한 손에 든 칼로 다른 한 손을 쳐내려는 전쟁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낭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역사전쟁을 끝내려면 개헌 논의에서 권력구조 개편보다 선거제도 개편을 앞세워야 한다. 중대선거구제,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다당제 제도화를 통해 대화와 타협의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역사청산을 이루려면 친일행위자의 행적을 철저히 밝히고, 친일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 후손에게 상속됐다면 다 환수해야 한다.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역사청산의 원칙을 만들어냈으면 한다. 그 원칙은 과거사를 넘어 우리의 미래를 밝혀줄 등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 뒤 '인권'과 '정의'의 이름으로 북한의 지도자와 부역자를 단죄한다면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선을 제대로 긋지 못하면 미래는 재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여배우의 증조부 논란은 미래진행형 사건이다. 우리의 증손자들이 2026년의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역사의 목적은 다음 세대에게 바다의 깊이를 알려주는 데 있어야 한다.

김중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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