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에비앙과 퇴주잔, 턱받이 같은 폭발적(?) 논란에 가렸지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게는 지난 12일 사소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의 선거캠프가 페이스북 그룹을 개설했다. 담당 기자가 가입하면 일정 등을 공지하는 채널로 쓰겠다고 했다. 명칭은 '반기문의 새소식'. 그런데 당일 오후늦게 그룹 이름을 바꿨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반 총장의 좌우명이다.
반기문에게 상선약수가 있다면 야권 유력주자 문재인 전 대표는 '운명'이란 화두를 달고 산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에도 정치에 거리를 두다 2012년 대선등판 요구에 끝내 출마할 때, 명분은 '운명'이었다.
반 전 총장 측은 언론창구 이름을 기능 위주의 '새소식'에서 '상선약수'로 바꿀만큼 행보 하나하나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상선약수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다. '가장 좋은 것(상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즉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는다는 구절로 이어진다. 대개 상선약수의 뜻풀이는 이 뒷 구절까지 포함한다.
상선약수는 UN의 수장까지 반 전 총장이 보여온 행보에 잘 들어맞는다. 본인도 이 말에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그는 2015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54번째 생일에 자신이 한자로 쓴 상선약수 휘호를 선물했다. 오바마가 뜻을 묻자 그는 "물은 세상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2.'정치인 반기문'이라면 이런 가치관은 유연함과 융통성으로 드러나기 쉽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 메시지다. 독자세력이 없는 가운데 기존 세력, 특히 중도 제3지대 규합을 모색하기에 적합하다. 강경일변도로 쉽게 부러지기보다는, 강할 때 강하고 부드러울 때 금세 부드럽게끔 태세 전환이 민첩할 수도 있다.
협치를 강조해 온 박형준 전 국회사무총장은 '상선약수'에 대해 "반 총장은 사회 곳곳의 병목현상을 풀어야 한다는 포용의 리더십을 내세운다"며 "이른바 개혁공동정권을 만들자는 뜻과도 '케미스트리'가 맞는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또 "반 전 총장은 전략적으로도 연합에 의한 국정운영, 협치와 분권을 취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문 전 대표의 운명론은 필연적으로 원칙론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불가피하므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그렇게까지 해서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대선을 겨냥하고 17일 출간한 대담집에도 그 원칙론이 드러난다.
-인생철학 딱 한마디로.
▶어려울 땐, 무조건 원칙적으로.('대한민국이 묻는다' p.177)
동시에 그 운명을 지게 한 존재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빼놓고는 문재인의 운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정치입문 신호탄이 된 책 '운명'(2011)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 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운명' p.467)
결국 문재인의 정치는 숙제이고 원칙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유연성을 발휘하기 힘들다. 그는 캠프가 준비한 멘트 한 줄도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면 '오케이' 하지 않고 고치고, 또 고친다.
#3.17일 현재 두 사람의 행보는 반드시 '상선약수'나 '운명'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반 전 총장은 입국과 동시에 '강기문' '센기문'이었다고 할만큼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물처럼 흐른다는 수식어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물살을 거꾸로 헤치고 갈 의지를 봤다는 이들이 많다. 한편 입국 후 행보는 부자연스러움, 구설수로 가득했다.
문 전 대표는 사드 즉시배치에 찬성도, 그렇다고 반대도 아니라고 하면서 '전략적 모호성'이란 평가가 따라 붙었다. 현실정치적인 문법을 쓴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정치에 호출됐다며 어정쩡하게 마이크를 잡곤 하던 2012년의 문재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결국 문재인도 운명에 갇히지 않으려 하고, 반기문도 '물에 물 탄 듯' 하지 않으려는 걸까.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반기문의 '상선약수'는 유연성, 문재인의 '운명'은 원칙론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서도 "그것이 그들의 정치행보를 완전히 규정하지는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