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핸드폰을 보면서 설명드릴게요, 경찰관님."
이렇게 말하는 용의자의 손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권민구 순경(27)은 용의자의 목적이 보이스피싱 일당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던 텔레그램 방을 '폭파'하는데 있음을 직감했다. 텔레그램 방에서는 용의자를 '대리님'이라고 부르는 누군가가 송금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권 순경은 용의자의 요청을 거부하고 "수사관이 조사를 위해 휴대폰을 임의 제출 받을 수 있다"고 절차를 안내한 뒤 지구대로 임의 동행했다. 자칫하면 보이스피싱의 결정적 증거가 사라질 뻔한 순간이었다.
지난달 28일 오후 2시 45분쯤 대구 수성경찰서 소속 황금지구대로 다급한 무전이 떨어졌다. '보이스피싱 전달책이 송금을 하는 것 같다'는 신고였다. 근무 교대를 한 권 순경은 지령을 받자마자 지구대에서 약 250m 떨어진 ATM 기기로 신속하게 순찰차를 몰았다. 아파트 앞 작은 상가 길에 위치한 1인 ATM 기기에서 돈을 송금하고 있는 용의자가 보였다.
동료와 함께 출동한 권 순경은 먼저 순찰차로 길목을 막았다. 혹시 모를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차에서 내려 용의자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레 마주친 경찰에 당황한 용의자의 발 옆으로 큰 가방이 보였다. 가방 속에는 아직 미처 송금하지 못한 500만원 현금 다발이 있었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관들의 추궁에 용의자는 "난 대구 사람이 아니라 지리도 잘 모른다", "이 돈은 지인에게 받아서 다른 지인에게 보내주고 있다"며 횡설수설했다.
용의자는 처음에 휴대폰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권 순경은 용의자에게 차분히 절차를 설명하고 휴대폰을 받아 지시를 전달받던 텔레그램 방을 확인했다. 권 순경은 "몇몇 대화들을 보니 용의자를 '대리님'이라고 부르고 이동과 송금을 지시하는 등 보이스피싱임을 직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권 순경은 "지금 폰을 섣불리 돌려줬다가는 증거가 모두 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고 말했다.
도주로가 막혀 난동도 피우지 못한 용의자는 경찰관들을 따라 지구대까지 임의 동행했다. 지인에게 돈을 송금하는 중이라던 용의자는 지구대에서 "보이스피싱인 줄 몰랐다", "그냥 알바로 고용됐다"라며 말을 바꿨다. 대구 수성경찰서가 현재 용의자를 조사하고 있다.
권 순경은 신고를 접수하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현장에 도착했다. 조금만 도착이 늦었더라면 남은 500만원도 회수하지 못할 뻔 했지만 권 순경은 회수하지 못한 1800만원이 못내 아쉽다고 한다. 지난해 4월 경찰학교를 졸업한 초임 순경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능숙한 대처로 증거인멸을 막았지만 "정황만 보고도 눈치를 채 신고해주신 시민이 정말 대단하시다"며 공을 한사코 돌렸다. 경력 1년 미만의 순경이 어떻게 이렇게 침착하게 대응했는지 궁금해졌다.
'이전에 큰 사건을 대응해 본 경험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권 순경은 쑥스러워하며 지난해 있었던 출동 경험을 말해줬다. 권 순경이 실무 배치를 받은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밤 9시쯤 신고가 떨어졌다. 마약사범이었다. 현장에 출동하자 마약에 취한 한 남성이 방문 틀에 서서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현장에는 남성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도 있었다.
경찰이 도착하자 아내는 "경찰관을 따라가라"며 남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남성은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대뜸 소주병을 집어든 남성은 자신의 머리를 내리쳐 병을 깨더니 그대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바닥이 남성이 흘린 피로 흥건히 물들었다. 상황이 급속도로 위험해지자 권 순경은 우선 남성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그리고 지원을 요청한 뒤 동료들과 함께 삼단봉을 빼 들었다. 권총이나 테이저건을 사용하기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정말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는 권 순경은 "솔직히 그렇게 위험한 상황도 흥건한 피를 본 것도 처음이어서 무서웠다"고 말했다. 권 순경은 불과 5m 간격을 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대치를 이어가다 '이대로면 피의자가 흥분해 더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삼단봉을 집어넣고 침착하게 피의자를 진정시켰다. 약간 진정이 된 남성은 여전히 깨진 병을 손에 쥔 채로 경찰관들과 대치를 이어갔다.
"가까이 오면 내 목을 찌르겠다"고 해 시작된 대치는 3시간 동안 이어져 자정 무렵이 됐다. 피를 많이 쏟아 지친 남성은 순간 빈틈을 보였다. 긴장된 마음으로 상황을 주시하던 권 순경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달려들어 남성을 제압했고 권 순경이 수갑을 채우며 소동은 끝이 났다. 권 순경은 "이 날의 경험으로 좀 더 마음의 무장을 하게 됐다"며 "출동을 나갈 땐 늘 최악의 상황까지도 생각하며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했다.
권 순경이 간절히 바랐던 경찰 생활이지만 신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고된 경찰 생활은 녹록지 않다. 권 순경이 힘들어도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가족과 동료들이다. 주변에 "우리 아들이 경찰이 됐다"며 자랑하던 권 순경의 아버지는 권 순경이 입직한지 반 년이 조금 지난 11월에 돌아가셨다. 시종일관 유쾌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이어 가던 권 순경의 목소리가 이 대목에서만큼은 조금 떨렸다.
권 순경은 "아버지 빈소에서 경찰서, 지역 경찰청에서 온 근조기를 보는데 든든한 마음이 들어 정말 많이 울었다"며 "현장에서도 내 편들이 뒤에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뛰어들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학교 상담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신 어머니와 두 살 위 누나도 든든한 지원군이다. 권 순경은 "제가 잘못 생각했던 부분을 짚어주시는 어머니 덕분에 현장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시민들을 대하고 있다"며 "아버지가 안 계신 만큼 제가 어머니를 잘 지켜드리고 싶다"고 웃어 보였다.
권 순경은 쉬는 날이면 틈틈이 크로스핏을 하며 체력을 기르고 법령을 찾아보기도 하는 '모범생'이다. 권 순경은 4일 자로 수성경찰서 사이버수사대로 발령 받았다. 지역 경찰에서 더 많은 시민을 만나고 싶었던 권 순경은 "경찰 입직 준비를 하면서 n번방 사건을 보고 정말 분개해 자기소개서에도 사이버 수사를 하고 싶다고 적었다"며 "다른 부서면 모르겠는데 사이버 수사는 제 꿈을 펼칠 기회인 것 같아 지원했다"고 했다.
권 순경은 "시민들이 저를 '봉사하는 따뜻한 경찰관'으로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 이 마음만큼은 퇴직 때까지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하며 활짝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