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후 40여 일이 지나면서 우리 사회는 또다시 둘로 쪼개졌다. 국회 청사 안까지 거침없던 계엄군의 군홧발 덕에 고질적 진영논리까지 무너지는가 했지만, 시간은 오히려 이 폐단이 얼마나 강고한지 증명하는 중이다. 그사이 양 진영의 상징 싸움도 치열했다. '촛불 대 태극기'라는 오랜 이분법이 '여의도 대 광화문'을 거쳐 '응원봉 대 경광봉'으로 진화하더니, 급기야 '인간 키세스 대 백골단'까지 추가되었다. 탄핵을 둘러싼 법적, 정치적 결과야 아직 남은 절차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상징성 경쟁에선 이미 승패가 갈렸다. 참된 민주주의를 외친다는 세력의 상징을, 공권력을 의미하는 '경광봉', 더구나 폭압적 공권력을 떠올릴 '백골단'에서 찾겠다니 꿈꾸는 세상이 경악스럽다.
더 주목해야 할 건 '응원봉'이 상징하는 시대적 열망이다. 탄핵과 내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최종 목적지일 수 없다. 그걸 넘어서 앞으로 함께 꿈꿔야 할 세상에 대한 상상과 토론이 치열해야 그나마 현재의 고통스러운 비용을 보상받을 길이 열린다. 사실 초기엔 응원봉 집회를 이끈 2030 여성 팬덤에 대한 오독(誤讀)도 많았다. 이들의 참여가 우발적이었다느니, 사적 애정에 기초한 일시적 현상이라느니, 결과적으론 '기특'하다는 식의 탈맥락화된 해석은 다행히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얼추 정리된 듯하다. 이제 필요한 건 '응원봉이 가리키는 세상'을 더 촘촘히 헤아리는 일이다.
응원봉은 태생부터 저항적이었다. 그 근원지 청소년 팬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옥'이라는 단어로만 설명되는 한국의 교육과 입시제도를 빼먹으면 안 된다. 엄혹한 경쟁의 일상에서 '팬질'은 많은 청소년에게 인생의 첫 주체적 선택으로 기억된다. 자기 삶을 향한 통제력의 근원인 부모와 학교가 용인하지 않는 주체성이었다. 응원봉은 개인에게 부여되는 존엄한 권리로서 주체성과 자율성을 훼손하는 어떠한 권위에도 순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리킨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 삶의 가치와 선택을 유예하려는 부당한 권력을 거부하는 세상 말이다.
응원봉은 확장적이다. 원래 개별 팬덤을 대표했지만 팬덤 간 경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상징으로 거듭났다. 스타를 향한 개인의 애정으로 뭉친 집단이 또 다른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로 확장된 것이다. 더욱이 응원봉은 아예 그게 뭔지도 몰랐던 세대로까지 빠르게 확장했다. 한국 사회를 특징 짓는 갈등과 분열이 상호 이해와 존중으로 극복되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서로 다른 응원봉들이 자아낸다는 '오색빛깔'은 차이를 뛰어넘는 연대가 가져다줄 장관을 보여주는 예증이다. 그 세상에선 더 이상 단절과 갈라치기의 꼼수는 유효하지 않다.
또, 응원봉은 유쾌하다. 집회를 압도하는 유쾌한 에너지는 비장함보다 더 강했다. 긴 호흡이 필요한 싸움에선, 단숨에 무언가를 이루려는 폭력보다 뛰어난 전술이다. 게다가 나의 '최애'를 향한 사랑이라는 긍정성에서 출발한다. 스타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선물하겠다는 의지가 그 동력이다. 이런 세상에선 특정인과 집단을 향한 혐오가 설 자리는 좁을 수밖에 없다. 혐오와 부정의 파괴력도 여기선 오래 버텨내지 못한다. 응원봉이 가리키는 세상을 함께 꿈꿔야 할 가장 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