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5년 전 오늘 2020년 2월10일(한국시간),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록이 줄줄이 쓰였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과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휩쓸며 4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파격의 연속이었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건 한국 영화 역사 101년 만에 처음이었다. 아시아계 영화로도 최초였다.
92년 전통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상이 비영어권 영화에 돌아간 것 역시 처음이었다. 영어로 만들어진 영화, 백인들만 주인공이 되는 시상식이어서 '화이트 오스카'란 논란이 줄곧 일었다.
외국 영화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도 초유의 일이었다.
기생충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는 1955년 미국 영화 '마티' 이후 65년 만이었다.
아카데미 시상식 현장은 축제 그 자체였다. 봉준호 감독은 각본상을 받고 "오늘 밤 한 잔 하겠다"더니 국제영화상으로 2관왕이 확정되자 "내일 아침까지 마실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3관왕, 4관왕까지 오르자 이 말을 되풀이하며 기쁨을 누렸다.
봉 감독은 함께 후보에 올랐던 다른 감독들을 언급하며 겸손한 모습도 보였다. 그는 영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을 차용해 "오스카(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허락한다면 이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외신도 새 역사를 쓴 기생충과 봉 감독을 크게 다뤘다. 미국 CNN은 "기생충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오스카의 92년 역사가 일요일 밤에 산산조각 났다"며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은 역사적 승리"라고 썼다.
2019년 5월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은 반지하 집에 사는 송강호 가족이 저택에 사는 고 이선균 집에서 일하면서 생긴 일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만남을 통해 현실을 풍자적으로 담아냈다.
기생충은 개봉 2주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한국 영화 중 가장 빠른 속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화제성도 단연 높아 수많은 명대사를 남겼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계획", "냄새가 선을 넘지", "부잔데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지" 등이다.
송강호와 고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이정은 등 배우들의 빈틈 없는 열연도 화제였다. 극중 등장하는 '채끝 짜파구리' 레시피도 한동안 유행이었다.
기생충은 당초 봉 감독이 연극으로 생각한 작품이었는데 써내려가면서 영화로 바뀌었다. 봉 감독은 영화 '설국열차'를 작업하면서 기생충을 구상했다고 한다. 설국열차에서도 상류층과 하류층이 대비되는데 이를 좀더 주변에 있는 사람들 얘기로 풀어보고자 한 것이 기생충 탄생으로 이어졌다.
'봉테일'로 불리는 봉 감독의 디테일은 기생충에서도 살아 있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계단이 계층 사다리를 상징하는 식이었다. 저택과 반지하 집 등 모든 공간은 세트로 촘촘하게 꾸며졌다.
봉 감독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손 꼽힌다. 만화를 즐겨보며 자란 그는 열두살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를 배운 뒤 충무로에서 경력을 쌓아 2000년 서른한살의 나이로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했다. 초창기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어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흥행 감독 타이틀을 따냈고 2006년 '괴물'로 천만 감독 반열에 올랐다. 이후 기생충으로 '쌍천만 감독'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