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병에 900만원씩 드릴게요. 저희 병원장님이 드실 샤또마고 와인 좀 대신 구매해주시겠어요."
식당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의 제안은 구체적이었다. 자신을 병원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단체 회식을 준비 중이라며 고가의 와인을 대신 구매해주면 차액을 남길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솔깃한 제안 뒤에는 치밀하게 짜인 사기가 숨어 있었다.
병원 직원이라고 속인 조직원은 업주가 잘 모르는 품목을 구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했다. 업주가 구매를 시도하면 판매상으로 가장한 또 다른 조직원이 접근해 주문을 받는다. 와인을 병당 550만원에 넘기겠다고 한다. 몇 병만 거래해도 수백만원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업주 마음이 흔들렸다. 와인은 오지 않았고 예약 손님도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물류 사고가 났다"는 말에 속아 추가 비용까지 지불한 경우도 있었다.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피싱범죄 조직원들이 소상공인으로부터 약 52억원을 뜯어낸 '노쇼(예약 부도) 사기' 방식이다.
피해자들의 설움은 일부 조직원들이 붙잡히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동부지검 보이스피싱 정부합동수사단(합수단)은 캄보디아 수사 당국과 국제 공조를 벌여 조직원들을 추적한 결과 지난해 11월 초부터 올해 1월 말까지 △1차 12명 △2차 23명 △3차 2명 등 총 37명을 검거했다.
그 중심엔 홍종현 서울경찰청 광역범죄수사대(광수대) 경감이 있었다. 홍 경감은 "국가정보원이 제공한 국제범죄 정보를 통해 사건을 접한 뒤 구글 스프레드시트처럼 실시간으로 입력되는 장부를 확보했다"며 "10월부터 IP(인터넷주소) 수사 등을 통해 계속해서 범인을 특정한 뒤 일부 조직원을 조사했고 덕분에 11월 캄보디아 현지에서 콜센터를 검거하는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범정부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의 콜센터 상담원들 역시 실시간으로 피해자 대응에 나섰다. 본거지를 급습한 것은 한·캄보디아 공동 한국인 범죄수사팀(코리아 전담반)이었다. 일련의 과정은 홍 경감이 공조의 의미를 다시 한번 체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홍 경감은 "전기통신금융사기가 말 그대로 전화와 금융서비스가 합쳐진 사기를 뜻하는 만큼 근절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금융감독원 등 여러 기관의 협업이 필요한 구조"라며 "갈수록 다양해지는 피싱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국가기관의 적극적이고 유기적인 공조가 필수"라고 말했다.
홍 경감은 2008년 순경 공채로 경찰 생활을 시작한 뒤 2010년 형사·과학수사 부서에서 근무했다. 이후 2020년 광수대의 전신인 금융범죄수사대 업무를 시작으로 6년간 피싱 범죄를 전담해왔다.
2022년부터는 보이스피싱 합수단에 파견돼 활동하다 올해 광수대로 복귀했다. 파견 중에는 해외에서 국내 번호로 발신 번호를 변작하는 중계기 수사를 전담했다.
홍 경감은 수사 과정에서 늘 피해자들이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피싱 범죄는 경제적 피해를 넘어 심리적 자책감까지 안겨주는 악질 범죄"라며 "대출까지 받아 사기를 당하고 빚도 갚지 못한 채 폐업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범죄를 저지르면 결국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며 "피해가 입었거나 의심되면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