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13일,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남성 연쇄살인범으로 기록된 김대두가 첫 범행을 저질렀다. 김대두는 전남과 서울, 경기 일대를 돌아다니며 17명을 살해하고 여성 3명을 성폭행하는 등 약 55일간 끔찍한 범행을 이어갔다.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 그의 범행은 피 묻은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긴 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면서 막을 내렸다.
김대두는 논 4마지기와 밭 1000평가량을 가진 가난한 농촌 가정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그를 대도시의 일류 중학교에 진학시키고 유학까지 보내려 할 정도로 교육에 힘썼지만, 시험에 떨어지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대도시 생활을 경험한 김대두의 눈높이는 이미 높아져 있었다. 어떻게든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국졸 학력의 농촌 출신인 데다 특별한 기술도 없었고, 키 160㎝가량의 왜소한 체격으로 사회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열등감에 빠진 그는 결국 범죄에 손을 대 폭력 등의 혐의로 전과 2범이 됐다. 공장을 전전하며 일을 하기도 했지만,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졌다.
그러던 1975년 8월 13일, 김대두는 전남 광산군(현 광주 광산구)의 한 외딴집에서 집주인 안모씨를 살해했다. 강도를 목적으로 첫 범행을 저지른 그는 이후 서울과 경기도 일대로 이동하며 범행을 이어갔다. 현실에 대한 비관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풀이 살인으로 번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칠순의 할머니와 어린아이까지 살해하면서 사회적 충격은 더 커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범행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1975년 10월 8일, 서울 청량리경찰서에 동대문구 전농동의 한 세탁소 주인으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한 청년이 피 묻은 청바지를 맡기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세탁소 앞에 잠복해 있다가 청바지를 찾으러 온 김대두를 붙잡았다. 검거 당시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은 "배가 고프다"였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남들보다 잘살고 싶었는데 교도소에 있다가 나오니 나를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며 "남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불빛도 많은데 내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어른은 내 얼굴을 기억할 것이고, 어린이는 우는 소리가 귀찮아서였다"고 태연하게 말해 공분을 사기도 했다.
현장검증에서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껌을 씹으며 히죽거리는 등 태연한 태도를 보였고, 교도소에 수감된 뒤에도 교도관과 재소자들을 폭행하는 등 문제 행동을 이어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던 김대두는 당시 국선 변호인이었던 이상혁 변호사와 서울구치소 교화위원들의 노력으로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후 자신의 범행을 참회한 그는 기독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형장에서는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친다. 전과자들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시정됐으면 한다.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말을 남겼다.
사형폐지운동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 변호사에 따르면 김대두는 마지막 순간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한 뒤 웃는 얼굴로 사형대에 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사형이 확정된 지 9개월 후인 1976년 12월 28일, 김대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