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선을 거침없이 돌파하며 "4000 간다"를 외쳤던 코스피가 2600대로 주저앉았다. 단타치듯 치고 빠지는 외국계 헤지펀드 자금이 연초부터 10조원대 매도를 단행하며 한국 증시를 끌어내렸다.
1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올해 1월1일부터 4월11일까지 코스피 시장에서 8조324억원, 코스닥 시장에서 2조1328억원을 각각 순매도했다. 코스피와 코스닥 합산 총 10조1652억원어치 한국 주식을 팔아치웠다.
연초 외국인이 코스피에서 약 8조원을 순매도하면서 코스피 외국인 투자자 비중은 11일 기준 31.4%까지 하락했다. 2016년 2월(31.9%) 이후 최저치다.
10조원이 넘는 외국인 매도가 쏟아지면서 지난해말 2977.65에 마감했던 코스피 지수는 3개월여만에 10% 가까이 빠지며 2700선을 밑돌고 있다. 코스닥 지수도 10.8% 하락했다.
한국 증시에는 슈퍼 개미, 동학개미, 큰손인 국민연금 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주식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는 외국인이다.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불과하지만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삼성전자(51.3%)를 비롯해 코스피 대형주의 외국인 지분율이 월등하게 높기 때문이다. 특히 코스피 강세장이 전개된 2020년~2021년 상반기까지 외국인 순매수와 코스피의 상관계수는 0.8로 외국인 매수가 코스피 상승의 주요 동력이었다.
한국 증시는 종종 '외국인 놀이터' 또는 '외국인의 현금인출기(ATM)'로 불린다. 외국인이 대규모 자금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이슈에 따라 강한 방향성 매매(매수·매도)를 단행하며 시장을 주도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1~3월 한국주식을 가장 많이 매도한 외국계 자금의 국적은 영국계였다. 영국계 자금은 1~3월 한국증시에서 총 5조3450억원을 순매도했다. 케이먼제도(-1조7530억원), 룩셈부르크(-1조4560억원) 외국인도 한국 주식을 많이 팔았다. 그밖에 캐나다(-1조80억원), 네덜란드(-9330억원), 싱가포르(-8640억원), 홍콩(-7900억원) 순이었다.
영국계(버진 아일랜드 등)와 네덜란드·룩셈부르크, 케이먼제도는 헤지펀드가 법인을 설립하기 용이한 조세피난처로 꼽힌다. 싱가포르와 홍콩도 법인세 혜택을 많이 주는 대표적인 헤지펀드 법인 설립지다. 조세회피지역 국적의 외국인 순매도 합산규모는 1~3월에만 이미 10조원을 넘어섰다. 한국 주식을 매도한 자금 대부분이 글로벌 헤지펀드, 액티브 자금이었다는 얘기다.
조세피난처에 역외법인으로 설립된 헤지펀드는 장기투자 중심의 미국·노르웨이 국적 국부펀드와 달리 단기투자 성격이 강하다. 수익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헤지펀드와 증시 이벤트에 맞춘 전략으로 짧은 호흡으로 매매하는 트레이딩 데스크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환율, 금리, 원자재 가격, 글로벌 이벤트 등에 맞춰 치고 빠지는 매매 패턴을 보인다.
반면 미국계 자금은 1~3월 한국 주식 하락기에 약 2조2090억원을 순매수했다. 국부펀드·연기금 중심의 노르웨이와 일본 국적 자금도 각각 3230억원, 5290억원 순매수를 기록했다. ETF(상장지수펀드) 중심의 미국계 패시브 펀드가 3월22일 이후 한국주식 순매수로 돌아섰지만 아직은 헤지펀드 중심의 외국인 매도 공세가 우위를 보이고 있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영국계나 케이먼제도 국적 외국계 자금은 연초 거시경제 영향에 따라 매도세가 집중된 측면이 있지만 이들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가변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이라며 "반면 연기금 중심의 미국계 자금은 매수나 매도 기조가 추세를 띠고 움직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한국 증시의 방향성에는 미국계 자금의 움직임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2022년초(1월1일~4월11일) 외국인이 가장 많이 판 한국 주식은 LG에너지솔루션으로 총 2조9967억원을 순매도했다. IPO(기업공개) 청약 물량이 반영된 수치다. 청약 매물이 많던 LG엔솔을 제외하면 삼성전자(2조4783억원), NAVER(1조116억원), 카카오(9531억원)가 외국인 순매도 1,2,3위를 차지했다.
NAVER와 카카오는 미국 뉴욕증시에서 인터넷 기술주가 급락하면서 동반 하락했다. 삼성전자는 1분기 사상 최대 실적에도 연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IT 수요 감소 우려에 외국인 매도가 계속되며 52주 신저가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