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상장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방향의 자본시장 개혁이 추진되면서 산업계와 일부 증권업계에서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그간 모호했던 중복상장 기준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는 공감했지만 획일적 규제로 이어지면 자금조달 환경이 위축될 수 있고 나아가 한국 산업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2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18일 청와대 주재 자본시장 정상화 간담회에서 제시된 중복상장 제한 방침 후속 조치로 한국거래소와 유관기관은 오는 6월 중 거래소 상장·공시 규정을 개정하고 중복상장 시 주주 충실의무를 적용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도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재계와 증권업계에서는 그간 중복상장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판단 기준이 부재했다는 점에서 기준 마련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 케이블 사업을 영위하는 티엠씨는 최대주주 케이피에프가 코스닥에 상장된 상태였지만 중복상장 논란을 딛고 지난해 12월 상장에 성공했다.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도 대주주인 BC카드 모회사 KT가 이미 상장사였던만큼 중복상장 논란이 제기됐지만 이달 증시에 성공적으로 입성했다.
반면 롯데그룹 내 물류사업을 영위하는 롯데글로벌로지스는 중복상장 논란 속 기관투자자 수요 부진으로 지난해 상장 계획을 철회했다. 공작기계 사업을 해온 DN솔루션즈 역시 지난해 상장을 추진하던 중 코스피 상장사 DN오토모티브가 모회사라는 점이 부각되며 상장이 무산됐다. 이를 두고 자산운용업계 일각에서는 DN솔루션즈가 모회사와 별도 사업을 영위하는 만큼 중복상장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에 명확한 기준이 마련되면 상장 및 자금조달 과정에서 불확실성이 완화될 수 있다는 평가다.
재계에서는 한국 산업이 제조업 중심이라는 특성을 고려해 중복상장 규제가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중복상장을 해소해 투자자 가치를 제고한 사례로 2023년 메리츠금융지주가 메리츠증권과 메리츠화재를 완전자회사로 편입한 경우가 거론되지만 마진이 높고 현금 여력이 충분한 금융사와 달리 제조업은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하고 마진이 낮다는 점에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2024년 기준 시가총액 대비 중복상장 비율이 미국은 0.35%, 일본은 4.38%인데 한국은 18.43%로 과도하다고 말하지만 미국은 플랫폼, 소프트웨어 중심의 고부가가치 산업 비중이 높아 수익성이 높고 일본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앞선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며 "후발주자였던 중국이 디스플레이, IT기기를 넘어 휴머노이드, AI(인공지능) 반도체 분야에서 앞서나가고 있는데 국내 기업들이 사업 재편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사실상 IPO(기업공개) 외에는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중복상장 규제 강화에 대한 우려는 이미 업계에서 확산하고 있다. 특히 시장에서는 AI 관련 핵심산업으로 꼽히는 반도체와 로보틱스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IPO를 추진해왔던 SK에코플랜트와 HD현대로보틱스가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SK에코플랜트는 그룹 내 반도체 기업인 SK트리켐, SK레조낙, SK머티리얼즈퍼포먼스 등을 차례로 자회사로 편입하는 등 건설에서 반도체 기업으로 체질 개선을 진행중이다. 다만 사업 전환의 성과를 위해서 추가적인 자금조달이 필요한 상황이다. HD현대로보틱스 또한 피지컬 AI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중국 기업과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대규모 투자와 자금 확보가 필요하다.
규제가 과도해질 경우 기업들이 모회사 유상증자 등을 통한 자금조달 방식을 택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 경우 모회사 주주의 지분 희석이 발생할 수 있다.
IPO를 담당하는 증권사 유관부서에서도 우려가 제기된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IPO 시장에서 가장 큰 딜은 LG씨엔에스였는데 실제로 주요 딜은 대기업 계열사에서 나온다"며 "국내 기업들은 대기업을 제외하면 규모가 작고 신규 기업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인만큼 규제가 강화되면 IPO 시장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기업의 중복상장에 제동을 걸면서 기업들의 정상적인 자금 조달과 투자 전략까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주주가치 훼손이 아니라는 내부 판단에도 정치권의 입김에 상장 계획을 철회하거나 수정하는 사례도 생긴다. 정책 설계 과정에서 기업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채 경영상 제약만 확대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자회사 IPO(기업공개)를 추진하던 기업들은 정부 정책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대통령까지 나서 이른바 '쪼개기(물적분할) 상장'을 비판하면서 IPO 추진 자체에 대한 부담도 크게 커졌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기업이 LS그룹이다. LS그룹은 미국 자회사 에식스솔루션즈의 국내 증시 상장을 추진했으나 지난 1월 상장 신청을 철회했다. 상장 추진 과정에서 논란이 확산된 데다 정치권까지 가세하면서 당초 계획대로 추진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LS그룹은 "이번 상장은 모회사의 가치를 희석하는 쪼개기 상장이 아니라 과거 인수한 해외 자산을 한국 자본시장에 소개하고 가치를 재평가받는 '재상장'의 성격"이라며 정면 대응에 나섰으나 결국 상장 계획을 접었다.
에식스솔루션즈는 LS그룹이 2008년 인수한 변압기·전기차 구동모터용 고출력 특수 권선 생산 기업이다. LS그룹은 최근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와 미국 내 변압기용 특수 권선 주문이 급증하는 상황을 고려해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한 상장을 추진해왔다. 에식스솔루션즈의 상장 계획이 무산되면서 LS MnM, LS엠트론 등 비상장 계열사의 상장 일정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기업들은 IPO를 단순한 자금 조달 수단을 넘어 기업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 자회사를 별도로 상장할 경우 해당 사업을 독립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 오히려 더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IPO 과정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상장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시 의무가 부과되는 만큼 국내 자본시장에서 지적돼 온 회계·지배구조의 불투명성을 개선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IPO는 기존 주주의 추가 부담 없이 외부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선택지로 평가돼왔다.
하지만 중복상장 규제 강화 기류가 확산하면서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 자체가 좁아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 논의 중인 기준이 그대로 적용될 경우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상당히 좁아질 것"이라며 "자금 조달뿐 아니라 사업 확장이나 투자 전략 전반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신사업 육성과 관련해서는 중복상장 규제의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 사태 이후 기업들도 자회사 상장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추진하고 있다"며 "신사업의 경우 초기에는 사업부 형태로 시작해 일정 규모에 이르면 별도 법인으로 독립시키고 외부 투자 유치를 통해 성장시키는게 일반적인데 이를 쪼개기 상장과 동일한 잣대를 들이밀면 기업의 투자 전략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밝혔다.
중복상장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가운데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중복상장 건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2023년 12월 소액주주 보호와 그룹 경영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모자회사 등 공시제도를 마련한 이후다.
25일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국내 중복상장 자회사(상장 모회사의 지분 50% 이상)는 239개사로 전체의 9.4%를 차지한다. 국내 상장사 중 자회사인 경우는 571개사로 전체의 22%를 차지한다. 상장사 5곳 중 1곳은 자회사라는 의미다. 모회사 기준으로 보면 상장한 자회사를 둔 기업은 357개사로 그 비중은 14%에 달했다. 해외 중복상장 비율(지난해 10월 기준)은 미국은 0.05%, 중국 2.4%, 일본 4%, 대만 2.7% 등 해외 주요국과 비교하면 비정상적 수준이라는 평가다.
우리나라가 중복상장 금지 원칙을 내세우면서 중복상장 비중을 획기적으로 줄인 일본 사례가 관심을 받고 있다. 김정남 전 네덜란드연기금자산운용(APG) 대표는 지난 12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에서 일본 상장 자회사가 2007년 467개사에서 지난해 7월 기준 215개사로 절반 이상 줄었다고 밝혔다. 2023년 공시제도 개정 이후 나타난 변화다. 일본 정부가 까다로운 공시로 중복상장을 압박하자 일본 대기업들이 자진 상장폐지에 나서거나 완전 자회사로 흡수하는 추세라는 설명이다.
도교증권거래소는 가이드라인을 통해 모자 상장회사와 지분법 적용 관계회사(모회사의 의결권 소유비율 20 이상 50% 이하 비연결자회사·관련 회사)가 소액주주 보호와 그룹 경영에 관한 내용을 기업지배구조 보고서에 상세히 기재하도록 했다. 이전에도 소액주주 보호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도록 권고했으나 불충분하다는 평가에 따라 '기재상의 포인트' 형태로 구체적인 내용을 적도록 했다. 자회사 상장 사유, 자회사 경영이나 임원 인사에 대한 모회사의 관여, 모회사가 경영에 미치는 영향, 자회사 상장시 소액주주와 모회사의 이해상충 리스크와 대응방안 등을 기재해야 한다. 공시제도 마련 이후에는 거래소 웹사이트 공개 요구, 우수·불량 공시사례 공개 등을 이어가며 규율을 강화했다.
일본 히타치는 모범사례로 꼽힌다. 한때 히타치 다수의 상장 자회사를 보유했으나 금속·건설·화성 등을 순차적으로 완전 자회사로 편입하거나 매각했다. 이후 ROE(자기자본이익률)·PBR(주가순자산비율) 등이 지속적으로 개선되며 일본 거버넌스 개혁의 대표 성공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은 별다른 규정이 없으나 중복상장 사례는 극히 드물다. 중복상장은 주주 간 이해충돌 문제로 인식돼 금기시하고 있다. 주주 소송이 활발한 문화에서 법적 리스크가 높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지주회사 알파벳은 구글, 유튜브, 웨이모, 딥마인드 등 여러 자회사를 뒀으나 상장사는 알파벳뿐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중복상장에 대한 규제를 두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싱가포르거래소는 상장규정을 통해 자회사의 상장 신청시 자산·영업범위 중복성 심사를 통과해야만 상장할 수 있도록 했다. 말레이시아거래소는 2022년부터 모자기업의 경우 지배관계를 중단해야만 상장 신청이 가능하도록 규제 수준을 강화했다.
김형균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중복상장 쟁점과 개선방향 토론회'에서 "장기적으로 일본 사례처럼 중복상장 자회사들의 완전 자회사화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신규 중복상장은 원칙 금지하되 이사들이 주주 충실의무 하에 필요성과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주주총회에서 소주주주의 다수결 제도를 통해 승인을 받는다면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