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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이런 장비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전 유성구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표준연) 창업공작소 202호. 30여년간 표준연에서 바이오 측정표준을 연구하며 기관장, 본부장을 두루 지낸 박상열 이노시스랩 대표가 자체 개발한 바이오 연구장비 '울트라-오디(Ultra-OD)'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박 대표는 표준연의 단계별·전주기 창업지원 프로그램(STEP)의 도움을 받아 3년 간의 준비 끝에 지난달 연구원 창업기업 이노시스랩을 설립하고, 오랫동안 미뤄뒀던 숙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연구자로서 생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마음먹었던 '바이오 분석장비 국산화'다.
그는 "남들 다 은퇴하고 노는 나이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도 있다"면서도 "공동창업자인 유희봉 부장과 연구소에서 늘 새로운 장비를 만들어 좋은 결과를 냈던 만큼, 계속 두드리면 결국 풀린다는 확신이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표준연 초년병 시절부터 '장비 국산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2017년 기관장을 맡으면서 '첨단측정장비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연구장비 국산화와 연구산업 육성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박 대표는 "측정·분석장비 상당수를 해외 제품에 의존하는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연구비 상당액이 장비와 시약 구입에 쓰이고 있지만 이를 국산 제품으로 대체하지 못해 무역 역조가 여전히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외국 업체들은 팔 때는 간이라도 빼줄 듯하다가, 막상 팔고 나면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새로 사라'고 할 만큼 애프터서비스가 부실하다"며 "반도체 수출로 나라를 먹여 살리듯, 연구산업도 장비와 시약을 하나의 산업으로 키워 우리 과학기술 발전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노시스랩의 첫 제품 초고감도 마이크로리터 자동 흡광분석시스템 '울트라-오디'는 박 대표가 10년 전 착상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바이오 실험실의 고질적 맹점인 '피드백의 부재'를 풀고자 했다.
바이오 실험에서 연구자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대목은 실험 진행 중간에 결과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야해 정해진 절차를 다 마친 뒤에야 결과가 제대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박 대표는 "프로토콜대로 따라가다 한참 뒤 최종 결과를 받아보고 나서야 어디서 잘못됐는지 알게 되는 식"이라고 말했다.
울트라-오디는 이런 '중간 점검' 문제를 해결했다. 극소량의 시료로 상태를 측정하고, 채집·측정·세척 과정을 자동으로 반복해 연구자가 실험 도중에도 시료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핵심 기술은 60㎜ 길이의 '모세관 흡광셀'이다. 시료에 빛을 통과시켜 흡수되는 양을 재는 부품으로, 빛의 이동 거리(광로)를 기존 장비의 1㎜ 이하에서 60㎜까지 늘려 측정 감도를 크게 높였다. 광로가 길수록 같은 양의 시료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신속하게 잡아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울트라-오디에는 '랩온어칩(lab-on-a-chip)'과 같은 실험실 집적화 아이디어가 깔려 있다. 커다란 실험실에서 여러 단계에 걸쳐 하던 분석을 손톱만 한 칩 하나에 모두 담아내는 기술이다. 학계가 20여년간 공들여 온 개념이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공작은 나오지 않았다.
박 대표는 그 이유를 반도체와 바이오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찾았다. 반도체는 고체에서 동작해 아무리 작게 깎아 만들어도 설계한 대로 정확히 작동한다. 반면 바이오 분석은 모든 과정이 액체(용액)를 다루는 일이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관에 액체를 흘려보내는 순간 공기 방울이 끼거나 관이 막히는 문제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반도체를 깎아내는 기술을 바이오에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없는 이유다.
이노시스랩은 칩을 정교하게 깎는 방식을 접었다. 대신 블록을 층층이 쌓고, 블록과 블록 사이에 액체가 흐르는 길(유로)을 내는 방식을 택했다. 이 길은 블록 사이에 끼우는 얇은 밀봉판(개스킷)에 새긴 홈을 따라 만들어진다. 홈은 레이저로 정밀하게 파낸다. 핵심은 유연함이다. 길을 바꾸고 싶으면 홈 모양만 다시 새기면 된다. 블록 재료도 필요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다. 한 번 만들면 바꾸기 어려운 기존 칩과 달리, 이노시스랩 방식은 언제든 길을 새로 그릴 수 있다.
이 유연함은 곧 '확장성'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빛으로 성분을 재는 흡광 측정을 끝낸 시료를 그냥 버리지 않고, 다음 길로 흘려보내 pH·이온·형광·면역센서에 차례로 통과시키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한 번 뽑은 시료 하나에서 여러 종류의 생화학 정보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 여러 항목을 동시에 재는 '복합 장비'로 발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박 대표는 "울트라-오디로 먼저 브랜드를 알린 뒤 곧바로 복합화 장비 연구에 착수할 계획"이라며 "경쟁자가 거의 없는 영역"이라고 말했다.
울트라-오디는 현재 기술성숙도(TRL) 7~8단계로, 실제 사용 환경을 가정한 검증 단계에 진입했다. 300회 자동 연속 측정 성능시험도 마쳤다. 핵심인 모세관 흡광셀의 원천 특허는 유럽연합(EU)·일본·중국 등 주요 시장에서 확보했거나 출원 중이다. 상용화 이후에는 박 대표가 국제 표준 활동으로 구축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영국 국가분석기관 LGC 등을 대상으로 베타테스트를 진행, 기술 신뢰성을 검증할 계획이다.
이노시스랩의 성장 전략은 2단계다. 장비로 신뢰를 쌓은 뒤 시약 사업으로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박 대표는 "장비 없이 시약 시장에 들어가긴 어렵다. 장비로 브랜드 파워를 잡으면 시약 접근이 훨씬 쉬워진다"며 "부가가치 높은 범용 시약·표준물질로 확장해 전체 바이오 장비·시약 시장의 0.5% 이상을 점유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이노시스랩은 2028년 흑자 전환, 2033년 매출 1000억원대 목표를 달성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