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에서 이상야릇한 쿠데타가 벌어졌다. 발발부터 진압 과정까지 베일에 가려있지만 쿠데타 이후의 터키 정국은 더욱 우려를 낳고 있다. 구 소련(러시아)의 실패한 쿠데타(1991년)가 3일만에 마무리된 반면 25년 뒤 터키 쿠데타는 6시간 만에 상황이 종료됐다.
터키 일부 군부 세력은 쿠데타 초반 최대도시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과 보스포러스해협 대교 2곳, 국영방송 등을 장악하는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휴가 중이었던 에르도안 대통령이 SNS를 통해 ‘쿠데타 진압에 국민이 나서달라’며 호소하는 등 전국적인 저항 분위기가 고조되며 쿠데타군은 지리멸렬했다. 결국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 발생 6시간 만에 이스탄불 국제공항을 통해 복귀해 '쿠데타는 실패했다'고 선언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쿠데타군은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정국을 장악했다'고 엄포를 놨지만 SNS를 타고 흘러다니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반격은 파급력이 훨씬 컸다. 대통령 지지자들은 수도 앙카라와 이스탄불 등에서 군부의 탱크를 막아서며 쿠데타에 반대했다. 도로에 엎드리거나 터키 국기를 들고 앉아 탱크의 이동을 막은 시민도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서 전해지는 쿠데타 현장의 탱크는 낯선 장면이 아니다. 옐친 전 대통령은 1991년 러시아 초대 대통령 당선 직후 발생한 보수 세력의 쿠데타에 맞서 쿠데타군의 탱크위에 직접 뛰어올라가 국민저항을 호소하며 온몸으로 체제 전복 시도를 저지했다. 쿠데타가 결국 ‘3일 천하’에 그친 뒤 옐친은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며 그해 12월8일 소련(당시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소련) 내 공화국 중 한곳이었다)의 해체를 선언했다.
국민적 영웅이 된 옐친이 정치적 가장 빛났던 순간은 탱크 위에서였다. 민주화를 이끌었지만 스스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옐친의 집권기에 러시아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의 사후 뒤를 이은 푸틴 대통령은 카리스마는 출중하지만 냉전 시기의 스탈린과 브레즈네프도 이뤄내지 못한 차르(구 러시아제국의 황제)의 재림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5.4운동에 필적하는 민주화운동이지만 진압과정에서 친위 쿠데타와 유사하게 변질된 1989년 베이징 천안문 사태 당시에도 탱크가 등장한다. 더 중요한 인물은 일명 '탱크맨'이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시내 한복판을 진격 중인 인민해방군 탱크를 한 청년이 온몸으로 막고 선 영화 같은 장면. AP통신이 촬영한 이 사진은 천안문 사태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전 세계에 퍼졌고, 사진 속 인물은 탱크맨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흰 셔츠, 검은 바지 차림의 청년은 양손에 비닐봉지를 쥔 채 악착같이 탱크 앞을 가로 막아서고, 급기야 운전병이 탱크에서 나와 그 청년과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운전병은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눴지만 위정자들은 침묵의 화법으로 무력진압만을 종용했을 뿐이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분출하던 중국의 민주화 요구는 탱크 앞에 짓이겨졌다.
지난 15일 발생한 터키 쿠데타 사흘 뒤 전면적인 수습책이 나왔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쿠데타 세력들이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한 데 이어 총리가 사형제 부활까지 거론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예고한 것이다. '쿠데타 연루' 혐의로 체포된 군인과 판·검사가 6000명에 육박한다.
에르도안 정권이 투표를 통해 합법적 권력을 부여받은 데 비해 쿠데타 세력은 정통성은 전혀 없다. 하지만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권력이 항상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터키에서 쿠데타 가능성이 끊임없이 언급되는 것은 민주적 에르도안 정권의 비민주성과 부패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쿠데타에 가담한 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 가능성을 우려하며 터키 정부에 '백지수표를 준 것은 아니다'라며 법치주의를 따르라고 주문하고 있다. 술탄이라고까지 불리는 에르도안의 거침없는 행보를 전세계가 주시한다.
마침 터키에서 피의 숙청이 언급된 7월18일은 독일의 히틀러가 나치즘의 전범이라 할 만한 책 '나의투쟁'을 출판한 날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총통이 돼 전쟁을 일으켰고 그의 종말은? 물론 언급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