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국 대선 판박이…美 '괴물 트럼프' 선택한 이유는

채플힐(미국)=양영권 기자
2016.11.09 16:28

'일자리' '감세' 전면에 내세운 트럼프, '비도덕' 이미지 불구 선거 승리

8일(현지시각)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대학도시 채플힐의 한 소방서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가 진행되고 있다. 채플힐이 속한 오렌지카운티는 대통령 선거에서 74%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줬지만 노스캐롤라이나 전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승리했다. /사진=양영권 기자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

미국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 노스캐롤라이나 오렌지카운티에서 개설한 영어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아만다 프루트에게 "누가 당선될 것 같냐"라는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쯤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형편없는(terrible) 후보들이 맞붙은 선거라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막말과 성추행 의혹, 세금 회피 등으로 선거기간 내내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이메일 스캔들로 신뢰성에서 점수를 깎였다.

기자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UNC) 채플힐 캠퍼스에 연수를 왔을 때, 먼저 미국 사회를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절대 종교와 정치에 대해서는 묻지도 말고 화제에 올리지도 말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기간 동안에는 이런 조언이 무색하게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이든, 함께 운동을 하는 야외이든 막론하고 선거가 주된 화제일 정도로 유권자들의 관심도 높았다. 그만큼 후보들과 관련한 선정적인(대부분 해당 후보에게 부정적인) 이슈가 많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당초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지만 트럼프 후보가 대표적인 경합주인 플로리다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승리하면서 선거는 후보간 큰 차이를 내며 판가름났다. 기자가 체류 중인 소도시 채플힐이 속해 있는 오렌지 카운티는 클린턴 후보에게 74.0%의 몰표를 줬지만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 트럼프의 이민자·관세 공약, 결국은 '일자리'

이번 미국 대선 결과는 우리에게 정동영, 이명박 후보가 출마한 2007년 대선을 떠올리게 했다. 현 정권에서 주요 부처 각료를 지낸 여당 후보와,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야당 후보가 맞붙어 야당 후보가 승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는 BBK로 대표되는 도덕적인 흠결에도 747(연평균 경제성장률 7%,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 공약을 동력으로 당선됐다. 초점을 '경제'에 맞췄던 것이다. 그가 추진했던 '뉴타운'은 참여 정부 때 서울 강남 지역 부동산 가격 급등에 소외감을 가졌던 서울의 기타 지역 주민들까지 사로 잡았다. 또 당시 참여정부는 부동산 보유·거래세 인상 등으로 '세금 폭탄'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었다.

8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의 한 소방서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공화당(맨 왼쪽)과 민주당(맨 오른쪽) 선거원들이 유권자들에게 투표 안내를 하고 있다. /사진=양영권 기자

트럼프 후보 역시 이번 대선에서 경제 이슈를 선점했다. 그의 주요 공약으로 이민자 정책을 꼽을 수 있다. 이는 곧 일자리 정책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등 이민자 관리를 강화해 불법이민자에게 빼앗긴 미국내 일자리를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관세 인상과 무역협정 재협상도 미국 내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목표다.

아울러 트럼프는 인프라 부문에 5000억 달러를 지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연임을 할 경우 1조달러를 지출하겠다며 프로젝트의 이름을 ‘1조 달러 재건 프로그램’으로 지었다. '4대강'으로 대표되는 이명박 후보의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 공약을 떠올리게 한다.

트럼프 후보의 감세 공약은 중소기업인, 자영업자들에게 통했다. 트럼프는 개인의 소득 수준에 따른 세금 비율을 현재 7구간에서 3구간으로 단순화하고, 법인세 최고 세율을 35%에서 15%로 낮춘다는 계획이다. 기자가 지난 8일 한 소방서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만난 자영업자인 워디 베이비스 씨는 트럼프 지지자라고 밝히면서 "트럼프의 공약대로 세금이 인하되면 우리같은 '스몰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큰 혜택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반면 클린턴 후보는 경제 공약 면에서 유권자들에게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저소득 계층 출신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립 초급대학의 등록금을 면제하고, 사내에서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돌리거나 ‘유급 교육휴가’를 시행하는 기업들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오밀조밀한 공약을 내놨을 뿐이다.

그의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1992년 선거에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표어를 내세워 현직 대통령이었던 여당 후보에게 승리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패배는 더욱 아쉽다.

또 클린턴 후보는 △연간 100만 달러 이상을 벌 경우 최소 30%의 세금을 부과하고, △연간 500만 달러 이상 소득에 대해서는 4%의 세금을 추가로 부과하고 △본사를 미국 밖으로 이전하는 기업에 대해 ‘출국세’를 신설하겠다고 하는 등 민감한 '증세'를 언급했다.

지지도 50%를 넘는 현직 대통령과, 역시 높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대통령 부인, 전직 대통령인 남편 등 '초호화' 유세단의 지원을 받았으면서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2007년 한국의 선거에서 531만표 차이로 당선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제 공약들이 대부분 그야말로 빌 공(空)자 '공약(空約)'이었음이 판명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위험한 괴물'이라고까지 불린 트럼프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택한 미국 유권자들이 봤던 것이 신기루와 같은 환상이었는지, 동물적인 경제감각에 바탕을 둔 비전이었는지 확인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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