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러시아(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사우디아라비아(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 등 전 세계 스트롱맨들의 자존심 싸움이 ‘코로나19’(COVID-19)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글로벌 경제를 넉아웃 상태로 내몰고 있다. 석유 시장에서 자국 점유율을 키우기 위해 유가 하락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겨뤄보겠다는 것이지만 그 댓가는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로나19’ 발발로 석유 수요와 가격이 하락하는 와중에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산’ 요구를 걷어찼다. 미국이 OPEC+(OPEC과 비OPEC 산유국 협의체)의 감산 노력에 무임승차해 유가 유지의 단물만 빼먹는 게 싫다는 이유에서다.
감산이 물거품이 되자 사우디는 급선회해 증산과 유가 인하를 선언, 9일(현지시간) 국제유가는 30달러 초반대로 급락했다. 사우디는 유가를 가능한 데까지 끌어내려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낼 심산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현 저유가 상황을 기회로 보고 버틸 모양새다. 특히 미국 셰일산업을 고사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국과 유럽국가 간 천연가스관 연결 사업 ‘노르드스트림2’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경제 제재를 가하자 복수의 칼을 갈아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 OPEC+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들을 인용해 ”러시아가 추가 감산에 동의하지 않은 건 OPEC+의 감산으로 미국 석유회사들이 반사이익을 보는 게 싫어서“라고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WJS)도 ”러시아가 이참에 미국 셰일산업 숨통을 끊어놔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미 셰일 기업들은 가뜩이나 높은 원유 생산 비용 때문에 생산량을 유지하는 데 애먹고 있다. 통상적으로 중동 산유국의 생산 단가가 배럴당 10달러라면, 셰일오일 생산 단가는 배럴당 30~40달러로 높다.
미 셰일업계가 채산성을 유지하려면 국제유가가 최소 60달러 이상은 돼야 한다. 2015~2016년 유가가 급락했을 때 여러 셰일 기업이 휘청였고 일부는 파산했다. 이번 가격 전쟁은 미 셰일 기업들을 또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다. 푸틴이 원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9일 오전까지만해도 트위터에 ”유가가 내리면 소비자에게 좋은 일!“이라며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오후에 ‘코로나19’ 긴급회의를 열고 유가 하락 등으로 인한 경제 충격을 막겠다며 세금 감면, 유동성 공급 등 모든 카드를 총동원하기로 했다.
이날 국제유가가 30% 폭락하자 이날 뉴욕 증시 주요 지수도 장중 7% 이상 급락해 1997년 이후 처음으로 서킷브레이커(매매 정지)가 발동되기도 했다.
러시아는 중동 산유국과도 아시아 시장점유율을 놓고 경쟁하려 한다. 최근 몇 년간 조성해놓은 170억 달러 규모의 국부펀드가 자신감의 기반이다. ‘유가 경쟁’도 불사하고 있다.
7일 사우디는 아시아, 미국, 유럽에 대한 공식 유가를 배럴당 최대 8달러 인하하면서 러시아 압박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저유가를 기반으로 편성해놓은 예산 덕에 유가 하락에도 큰 손해를 보지 않으리라 봤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2년간 쓰고도 남은 예산 덕에 유가가 40달러 선쯤 머물러 준다면 러시아는 정부지출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히려 사우디 정부가 수지균형을 맞추려면 유가가 최소 배럴당 92달러는 돼야 한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사우디는 원유 생산 비용이 배럴당 2~4달러로 산유국 중 가장 낮지만, 운송 등에 드는 부가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FT는 유가가 배럴당 36달러 선까지 떨어진 지금부터 사우디가 정부지출을 줄이고 사우디 현대화 프로젝트 ‘비전2030’ 투자금을 줄여야 할 판이라고 했다. 이는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입지를 약화할 수 있다.
빈 살만은 ‘비非석유’ 분야에서 성장동력을 키운다며 관광·문화산업 등을 북돋아왔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으로 상황이 녹록지 않다. 여기에 출혈경쟁으로 오일머니까지 줄면 그의 권력 강화작업이 힘을 잃을 수 있다. 그는 최근 또다시 왕족 숙청을 단행하는 등 '왕위 계승' 사전작업에 돌입했다.
8~9일 사우디 증시에서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주가는 15% 넘게 급락했다. 9일엔 10% 넘게 떨어지면서 거래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이에 주가는 지난해 12월 기업 공개(IPO) 이후 처음으로 공모가 아래로 떨어졌다.
암리타 센 에너지애스팩트(EnergyAspects) 애널리스트는 ”사우디가 러시아를 상대로 근육 자랑을 하고 있다"며 ”러시아를 다시 협상 테이블로 꺼내려는 전략일 수 있으나, 효과가 없을 시 전 세계 산유국에 심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