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 지표에 따르면 탄탄한 성장세에도 정작 구직자들은 고용 찬바람을 맞는 중이다. 여기에 최고경영자(CEO)들의 발언을 들어보면 내년에도 기업들이 인력 충원 대신 인공지능(AI) 활용을 확대하면서 '고용 없는 호황'이 이어질 가능성이 보인다.
2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이달 앞서 예일대 경영대학원이 주최한 최고경영자(CEO) 간담회에서 이뤄진 설문에서 내년에 채용 계획이 있다고 밝힌 경영진은 1/3에 불과했다. 나머지 2/3는 인력을 감축하거나 현재 규모를 유지하겠다고 답했다. 전자상거래 플랫폼 쇼피파이와 핀테크 기업 차임파이낸셜는 내년에 직원 수를 더 늘리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기업들이 채용을 꺼리는 배경으론 경기 불확실성과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과도한 인력 확충에 따른 조정 등이 꼽힌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AI가 더 많은 업무를 대신할 수 있을 거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인력 확충의 필요성이 크게 낮아졌단 점이라고 WSJ은 짚었다.
간담회에 참석한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크리스토퍼 월러 이사는 "현재 고용 성장률은 거의 멈춰선 상태"라면서 "CEO들은 AI가 어떤 업무를 대신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설 때까지 채용을 미루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미국의 3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연율 4.3%를 기록하면서 시장 전망치인 3.2%를 훌쩍 뛰어넘었다. 통상 이런 성장 국면에선 고용과 개인 소득이 함께 늘며 소비를 떠받치는 선순환이 나타난다. 그러나 11월 실업률은 4.6%로 4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자금이 경제 전반에 활발하게 돌고 있지만 신규 일자리 창출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단 의미다. 컨설팅회사 KPMG의 다이앤 스웡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경제 성장과 노동시장 성과가 분리됐다"고 진단했다.
구직자들은 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노동시장 냉기를 체감하고 있다. 비즈니스인사이더에 따르면 화이트칼라 구직자들은 "새 일자리를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토로한다. 한 자리를 두고 지원자 수백 명이 몰리는가 하면 채용 절차가 까다로워지고 AI 기반 서류 심사로 조기 탈락하는 사례도 다반사라는 게 구직자들의 설명이다.
기업들은 AI 투자에 적극적이다. 골드만삭스리서치는 26일 내년 세계 AI 시장에서 대형 IT 기업들의 설비투자 규모를 5270억달러(약 760조원)로 추산했다. 지난 3분기만 해도 4650억달러를 예상했으나 한 분기 만에 13% 상향 조정했다. 올해 3940억달러에 비해선 34%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내년에도 미국 경제가 '고용 없는 호황' 국면을 이어갈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AI 투자 성과가 본격화될수록 기업들은 인력을 늘리기보다 생산성을 더 끌어올리는 쪽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대형 은행 웰스파고의 찰리 샤프 CEO는 앞으로 직원 수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AI가 인력 운영에 미치는 영향이 극도로 클 것"이라며 그 효과가 본격화하기까진 수년이 걸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AI가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진 않겠지만 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했다. 비용 절감과 조직 개편으로 웰스파고 직원 수는 이미 2019년 대비 20% 넘게 줄어든 상태다.
구인·구직 플랫폼 인디드는 내년 미국의 실업률이 4.6% 안팎에서 머물 것으로 예상했다.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 개발, 마케팅, 엔터테인먼트 등 고소득 직종의 경우 고용 둔화가 두드러지고 의료, 건설 같은 산업에선 채용이 활발할 수 있단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