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의 달러패권을 강화하고 다른 나라들의 통화주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의 디지털자산 제도화 논의가 막바지 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 한국도 미국의 지니어스법·클래리티법안에 해당하는 디지털자산기본법의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스테이블코인이 무엇이길래 이같은 경고가 나오는 것일까.
오픈스탠다드는 지난달 30일 달러 스테이블코인 '오픈 USD'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오픈스탠다드는 비자와 마스터카드, 스트라이프, 코인베이스 등 글로벌 결제·디지털자산 인프라 기업들이 참여한 연합체다. 한국에서도 삼성전자와 신한금융, 두나무,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KB국민카드, 우리카드, 하나카드, 현대카드, 삼성카드, BC카드, NH농협카드 등이 이름을 올렸다. 글로벌 결제 인프라에서 스테이블코인의 역할이 확대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미국의 디지털자산 제도화 논의는 막바지 국면이다. 지니어스법은 지난해 7월 제정됐다. 현재 시행규칙 제정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니어스법은 스테이블코인을 규제하는 법이다. 미국은 지니어스법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과 준비금·공시·감독 체계를 법으로 명확히 했다. 스테이블코인 이용자를 보호하고 금융안정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됐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달러패권을 강화하려는 속내가 담겼다고 평가한다.
디지털자산 시장 전반을 규율하는 클래리티법안은 지난 5월14일(현지시간) 미 상원 은행위원회를 통과했다. 상원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막판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에 이자·리워드를 제공하는 것을 허용할지 여부가 최대 쟁점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간 감독권 배분, 자금세탁방지, 정치권 이해상충 문제 등도 논의 중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가치가 특정 자산에 고정되도록 설계된 디지털 토큰을 말한다. 예컨대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1코인이 1달러가 되도록 만든 코인이다. 현재 널리 쓰이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는 테더가 만든 USDT와 써클이 만든 USDC가 있다.
즉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페그제 등 고정환율제를 채택한 나라의 화폐들과 경제적 개념상으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달러 페그제란 자국 화폐와 달러의 교환비율(환율)을 고정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사우디아라비아는 1달러당 3.75리얄을 고정하는 달러 페그제를 사용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사우디아라비아 리얄화 등 달러 페그제를 채택한 나라의 화폐와 다른 것은 블록체인(분산원장)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자산의 일종이라는 점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면 은행·국가 간 결제망을 통하지 않고도 빠른 속도로 국가 간 결제, 송금 등이 가능하다.
또 디지털 자산이라는 특성을 활용해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 자동으로 결제하는 등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 중고거래시 쓰이는 안전거래가 제3자의 개입 없이 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 5월 8일 스페인은행 라틴아메리카 경제 포럼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제공하는 기술은 진정으로 혁신적"이라며 "분장원장 기술을 통해 발행, 거래, 결제를 단일 플랫폼에서 수행하고 복잡한 기존 중개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 접근 가능한 다국적 금융 인프라를 처음부터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은 왜 만들어졌을까. '1코인=1달러'라는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이 없다면 스테이블코인 대신에 달러를 직접 쓰면 되지 않을까?
스테이블코인은 암호화폐 시장의 확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암호화폐 거래소나 디파이 시장(탈중앙화된 금융, 블록체인의 스마트 콘트랙트에서 작동하는 금융 서비스)에서 화폐의 역할을 할 매개체가 필요한데 달러 등 기존 화폐로는 불편함이 컸다. 코인 거래 시 투자자가 매번 은행 계좌로 달러를 넣고 빼는 것이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암호화폐 거래소 내에서 장부상으로 처리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거래소에 대한 신뢰 문제가 있고, 이마저도 디파이 시장에서는 활용하기 어려웠다.
대표적인 암호화폐인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도 스테이블코인과 유사한 기술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 기능적으로는 충분히 결제나 대기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가격 변동성이 너무 커서 실제로는 사용하기 어려웠다. 결제가 이뤄지는 찰나의 시간 동안 가치가 크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년 전 테슬라가 자사의 차량을 비트코인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 때, 자동차 한대를 몇 비트에 팔 것인지가 화제가 됐다. 비트코인 시세에 따라 소비자가 실제로 지불하는 가치가 달러 환산 시 크게 차이가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자동차 가격이 시가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즉 스테이블코인은 암호화폐 시장 내부의 가치전달 수단으로서 등장했다. 쉽게 말해 '코인판의 달러'가 필요했던 것이다.
블록체인 경제가 세계 경제의 작은 일부분으로서 머물렀다면 스테이블코인 또한 '찻잔 속 태풍'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블록체인 경제는 그 규모와 기능 모두 크게 확대됐다. 블록체인 경제의 확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당 경제의 현금인 스테이블코인의 위상 또한 높아지고 있다.
우선 암호화폐 시장 규모가 크게 확대됐다. 암호화폐 데이터 분석 업체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2016년 7월 암호화폐 전체 시장 규모는 약 120억~130억 달러(약 20조 원)였다. 올해 7월초 기준으로는 약 2조 1600억 달러로 집계됐다. 10년 만에 200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은 더 드라마틱하다. USDT 시가총액은 2016년 1월 기준 약 95만 달러로 추정된다. 현재는 약 1841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USDC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현재는 733억 달러 규모다. 스테이블코인 전체 시가총액은 3120억 달러로 추산된다.
블록체인 경제는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암호화폐 거래 외에도 기능적으로 크게 확장됐다.
우선 디파이 시장을 들 수 있다. 디파이란 블록체인을 활용한 탈중앙화 금융을 말한다. 대출, 예치, 스와프, 파생 등과 같은 금융 기능이 조건이 달성되면 자동으로 이행되는 코드화된 계약인 스마트 콘트랙트 하에서 처리된다. 디파이 데이터 분석 업체 디파이라마는 7월초 기준 디파이 총예치자산(TVL)을 약 724억 달러로 집계했다.
이제 막 개화되기 시작한 자산 토큰화(RWA)도 블록체인 경제의 대표주자다. 자산 토큰화란 주식, 채권, 펀드, 머니마켓펀드, 부동산, 사모신용 등의 자산을 블록체인상의 토큰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토큰증권업체 인베스타엑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토큰화 시장 규모는 290억 달러 수준이다. 2024년에는 약 79억 달러 수준이었다. 현재 각국에서 관련 규제를 정비하고 있어 잠재력이 매우 큰 분야로 꼽힌다.
결제·송금 인프라 부문에서 블록체인을 활용하는 경우도 확대되고 있다. 해당 분야는 아직 전체 거래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세계 경제에 대한 함의는 작지 않다. 은행망을 이용하던 결제시스템 자체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폐가치가 안정적이지 않거나, 금융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은 나라, 국가의 자본통제로 해외송금에 매우 높은 수수료를 부과하는 나라 등에서는 국외로 돈을 보낼 때 암호화폐를 사용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가격 변동을 감수하고 비트코인을 이용했는데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해 5월 발표한 '중력을 거스르는가? 비트코인, 이더리움 및 스테이블코인 국경 간 흐름에 대한 실증분석' 보고서에서 "선진국에서 신흥시장 및 개발도상국으로 스테이블코인이나 비트코인을 이용한 국경 간 자금 흐름이 활발해지고 있다. 기존 금융기관을 통한 송금 수수료가 높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위의 내용만 보면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적 특성 덕분에 사용자에게 편리한 도구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이 왜 달러패권을 강화하고 각국의 통화주권에 위협이 된다는 것일까.
이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달러패권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달러패권은 달러가 미국의 화폐를 넘어 전세계 무역·금융·저축·투자·회계 등의 단위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전 세계 결제망과 은행 시스템, 환율 정산 시스템 등은 달러를 기준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한국 사람이 원화를 엔화로 바꿀 때 겉으로는 원/엔 환율에 따라 정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달러→엔'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현재 사용되는 스테이블코인 대부분은 미국 달러 표시 자산이다. BIS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 시장가치의 약 98.1%가 달러 표시 자산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사실상 전세계 블록체인 경제가 달러 위에서 작동한다는 뜻이다. 특히 미국이 지니어스법을 통해 미국 국채·현금·예금 등 보유한 만큼 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규제하면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달러의 새로운 유통망이 되고 있다. 화폐가 네트워크효과가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달러패권을 강화하는 또 다른 장치가 된다.
블록체인 경제가 우리 경제의 일부분에 머물 때는 큰 영향이 없다. 그러나 코인 거래에 한정하더라도 블록체인 경제는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있다. 앞으로 많은 나라들이 자산 토큰화 등을 추진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 사용비중이 98%에 달하는 것은 위협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이 강화되면 극단적으로 각 국의 화폐는 잠시 보유할 뿐이고 결국은 달러 기반으로 투자·저축 등의 경제 활동을 하게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면 통화주권이 침해되면 어떤 점이 안 좋을까.
일반인 입장에서 가장 큰 단점은 환율 리스크가 일상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으면서 해외여행이 위축되고 유학생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입업자도 경영에 곤란을 겪고 있다.
통화주권이 침해되면 이같은 어려움을 일상에서 겪을 수 있다. 만약 국내외 플랫폼에서 물건값, 구독료 등을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만 처리하는 경우 월급은 원화로 받는데 지출이나 자산 매입은 달러로 해야 한다. 원/달러 환율이 오르면 한국 소비자가 같은 재화·서비스를 더 비싸게 사야 한다는 뜻이다. 통화주권이 침해된 상태에서는 해당 국의 화폐수요가 줄어 환율 방어가 쉽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정책적으로는 통화정책의 효과가 크게 줄어들 수 있다. 현재 통화정책 체계에서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조정하면 은행이 이에 따라 대출금리를 바꿔 통화량을 조절한다. 그런데 통화주권이 침해된 상태에서는 일반인들이 원화를 덜 보유하기 때문에 한국 금리가 대출·소비·투자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느슨해질 수 있다. 극단적으로 모든 사람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표시된 디파이 시장을 통해 금융활동을 하는 경우 해당국 중앙은행의 금리 조정은 거시경제에 영향을 주기 어렵게 된다.
각국에서는 통화주권 침해를 막기위한 대응 방안 마련을 고심 중이다. 일각에서는 통화주권을 지키기 위해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대항하는 자국 통화 표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부가 발행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통해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우선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했을 때 가장 큰 단점은 발행사의 도산 가능성이다. 스테이블코인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발행사 도산은 최악의 경우 금융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실제로 테라·루나의 발행사 테라폼랩스가 도산하면서 전세계에 약 400억~500억 달러 규모의 피해를 안기기도 했다. 지니어스법과 유사한 법을 통해 준비자산을 강제하면 도산을 방지할 수 있지만 발행사가 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어 금융안정을 100% 담보하긴 어렵다.
CBDC는 국가가 발행하기 때문에 이같은 위험은 없다. 다만 개인의 경제활동을 국가가 감시할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다. 특히 정부가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일부 국가에서는 새로운 빅브라더의 출연을 불러올 수 있다. 민간에 비해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늦어질 수 있다는 점도 단점이다.
라가르드 총재는 "화폐 기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반이 탄탄해야 한다. 더욱 심층적이고 통합된 자본 시장과 안전자산이 필요하다"며 "스테이블코인이 제공한다고 알려진 이점을 얻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이 정말 필요한가, 아니면 우리가 수단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제 답은 기능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오익 고려대학교 교수는 머니투데이에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화폐에 대한 신뢰"라며 "환경 변화에 맞춰 누가 신뢰를 제공하느냐 혹은 어떻게 신뢰를 보장할 것인가를 제도 설계 중심에 둬야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