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가상자산 시장구조를 확정하는 '클래리티법(CLARITY Act)'이 오는 9월 표결대에 오른다.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 상원 회기가 약 3주밖에 남지 않아 연내 입법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공화당은 연내 입법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상자산 제도화를 본인의 주요 정책 아젠다로 삼고 있어서다. 다만 제도화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커지면 미국 금리에도 하방 압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며 경제적 파급효과에도 관심이 쏠린다.
존 튠(John Thune) 미국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는 지난 8일(현지시간) 클래리티법에 대한 토론종결 표결을 다음달 15일 실시한다고 밝혔다. 해당 표결에서 법안 처리 찬성측이 60표를 확보하면 법안이 본회의로 넘어가지만, 공화당이 민주당 7표를 추가로 확보해야 해 현재로서는 처리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황이다. 클래리티법은 가상자산의 법적 성격을 규정하고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감독 권한 등을 정하는 디지털자산 시장구조 법안이다.
현재 협상의 쟁점 가운데 하나는 스테이블코인 보상이다. 은행권은 가상자산 거래소 등이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한 고객에게 사실상 이자와 같은 보상을 제공하면 은행 예금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가상자산 업계는 보상을 지나치게 제한하면 기존 금융회사만 보호하는 반경쟁적 규제가 될 수 있다고 맞선다.
현재 상원안은 절충안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히 보유하는 대가로 지급하는 보상은 금지하는 대신 결제 등 실제 거래 활동에 따른 보상은 허용하는 방향을 담고 있다. 다만 이조차도 은행권은 거래에 연계된 보상 역시 사실상 예금이자와 경쟁할 수 있다며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이 중간선거 직전 클래리티법안을 표결대에 올린 것은 미 의회 상하원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을 때 법안을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간선거 이후 상하원의 정치지형이 변하면 법안처리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또 일각에서는 클래리티법이 통과되면 미국의 금리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정책금리를 인하하지 않고도 경기를 활성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의 중간선거는 대통령 임기 4년의 중간에 치러지는 연방의회 선거로 하원 전체와 상원 의석 약 3분의 1을 선출한다.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이 강해 이번 중간선거 역시 트럼프 행정부 후반기 국정운영 동력을 좌우할 분수령으로 꼽힌다. 차기 대선의 전초전 성격도 갖고 있다.
일각에서는 클래리티법 통과가 코인 수요를 확대하고 이에 따라 미국 국채 수요를 늘려 금리를 낮출 수 있다고 보고있다.
물론 클래리티법이 직접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늘리는 것은 아니다. 해당 법안의 핵심 역할은 디지털자산의 법적 성격과 규제 주체를 명확히 해 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가상자산이 증권인지 상품인지, 어떤 기관의 감독을 받아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이어졌다. 클래리티법이 통과되면 사업자들이 보다 명확한 규칙 아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더해 스테이블코인 보상과 활용 범위에 대한 규칙까지 정해지면 거래소와 결제업체, 금융회사들이 관련 상품과 서비스를 확대하기 쉬워질 수 있다. 기관과 개인 입장에서도 규제 불확실성이 줄어들면 스테이블코인을 결제나 송금, 자산 보관 수단으로 이용할 유인이 커진다. 결국 클래리티법은 시장 확대를 가로막던 제도적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늘어나면 발행사들은 이에 맞춰 발행량을 늘리게 된다. 이때 지난해 통과된 지니어스법에 따라 발행사는 늘어난 스테이블코인만큼 현금과 단기 미 국채 등 안전자산을 준비자산으로 추가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클래리티법이 스테이블코인 이용 확대를 촉진할 경우, 그 효과가 지니어스법의 준비자산 규정을 통해 미 국채 수요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스테이블코인의 국채 매수가 단기 금리를 중심으로 이자율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실증 결과가 나왔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 6월 발표한 워킹페이퍼 '스테이블코인과 안전자산 가격'에 따르면 2021년 1월부터 올해 3월까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35억 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 자금이 유입되면 3개월 만기 미 국채금리가 0.71bp(1bp=0.01%포인트)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효과는 더 커져 약 10일 뒤에는 4bp, 13일 뒤에는 최대 5bp가량 낮아졌다.
스테이블코인에 돈이 들어오면 발행사는 준비자산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 이 돈으로 미 국채를 사면 국채 가격은 오르고 금리는 떨어진다. 지난해 지니어스법이 제정되면서 이런 연결고리는 제도적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수조달러 규모로 커질 경우 효과는 더 커질 수 있다. BIS는 지난 6월 발표한 '스테이블코인의 거시경제학(The macroeconomics of stablecoins)'에서 미국 경제를 대상으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2500억 달러에서 3조 달러까지 확대되는 상황을 모형으로 분석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준비자산을 단기국채로 보유한다고 가정한 기본 시나리오에서 시장 규모가 2조 달러 수준에 도달하면 미 단기국채 금리는 약 25bp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준이 정책금리를 한번 인하하는 효과와 같다.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가 3조 달러에 가까워지면 하락폭은 30bp를 넘어섰다.
금리 영향은 국채시장에만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스티븐 미란 전 연준 이사는 지난해 11월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과잉: 통화정책에 대한 함의'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스테이블코인 확대가 미국의 중립금리를 낮추는 장기적인 힘이 될 가능성을 제기했다. 중립금리란 경제를 부양하지도 억제하지도 않는 금리 수준을 말한다. 중립금리가 내려가면 경제 상황이 같더라도 적정 기준금리 수준 역시 이전보다 낮아질 수 있다.
그는 특히 미국 밖에 있는 달러 수요에 주목했다. 미국인은 은행예금이나 미 국채 등 달러 자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일부 신흥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런 해외 투자자에게 달러를 보다 쉽게 보유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해외에서 현지 통화를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꾸면 발행사는 그만큼 미 국채 등 달러 자산을 추가로 매입하게 된다. 기존 달러 자산 간 이동이 아니라 미국 금융시장으로 새로운 자금이 들어오는 경우 미국 전체의 대부자금 공급이 늘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란 전 이사는 이를 2000년대 금리 하락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글로벌 저축과잉'과 비교했다. 당시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세계의 과잉 저축이 미국 자산으로 유입되면서 미국 금리를 낮춘다고 분석했다. 이번에는 해외의 달러 수요가 스테이블코인을 타고 미 국채시장으로 들어오는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과잉'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란 전 이사는 연설에서 "스테이블코인의 진정한 기회는 달러 접근이 제한된 국가의 저축자들이 가진 아직 충족되지 않은 달러자산 수요를 흡수하는 데 있다"며 "비교적 보수적인 스테이블코인 성장 전망만으로도 경제의 순 대부자금 공급이 늘어나 중립금리를 낮출 수 있다. 중립금리가 낮아진다면 건강한 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금리 역시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낮아져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