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하려면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한 약관에 동의해야 한다. 특정 직업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학위나 자격증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분됐다. 이자나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수입 일부를 일상적으로 금융권에 납부하고 있기도 하다.
절차는 복잡해졌고 지켜야 할 규칙은 늘어났다. '관료제 유토피아'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 런던정경대(LSE)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현대사회의 '관료화'에서 비롯됐다고 꼬집는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와 관료제가 만나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온갖 규칙과 규제를 생산해냈다고 지적한다. 정부 업무는 물론이고 대기업, 금융권, 심지어 학교에도 관료주의가 널리 퍼져 개인을 통제하고 획일화된 시스템을 강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레이버 교수는 그러나 '묻지마'식 '규제 철폐'(deregulation)도 경계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말은 종종 '개혁'이라는 단어로 포장돼 마치 관료주의를 타파할 해결책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는 "'규제 철폐'는 안타깝게도 각 이익단체나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규제의 구조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사회 곳곳에서 '규제철폐'라는 이름을 앞세우면서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규제로 바꾸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규칙은 점점 더 복잡하고 치밀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규칙을 관리하는 관료들의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개인의 자유는 그만큼 줄었으며 처리해야 할 서류도 늘었다. 또 규칙을 만들어내는 극소수 거대 자본의 지배를 받는 현재의 사회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타개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레이버 교수는 '관료제 유토피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탈출구로 '놀이'에 대한 공포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놀이는 규칙 없는 자유로움의 상징이다. 항상 규칙이 존재하는 스포츠 시합과는 다르다. 우리는 규칙 덕분에 공정함이 담보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결국 우리의 독창성을 옭아매는 도구일 뿐이다.
그는 "인류의 위대한 성취는 항상 돈키호테 같은 엉뚱한 환상 추구의 결과였다"며 규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인류가 한발 진보해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든 관료제든 아무리 공고해 보이는 시스템이라도 그것이 없는 더 나은 세상을 꿈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레이버 교수는 '관료제'라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소재에 독특한 문체로 생기를 불어넣었다. 카프카의 소설 '심판', 미·소 우주개발 경쟁 사례, '배트맨' 영화 등 풍부한 사례를 곁들였다.
◇관료제 유토피아=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김영배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360쪽/1만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