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승패만이 중요하지 않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에서다. 1202대의 CPU와 176대의 GPU가 탑재된 알파고의 하루는 인간의 35년 7개월과 맞먹는다. 경기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 감정의 기복이나 심리적인 흔들림도 알파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 안되는데요", "정말 당황하게 만드는데요", "어떤 의미죠", "할 말이 없네요", 대국을 지켜보는 해설자들이 알파고의 수를 보며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오롯이 '승리'만을 위해 프로그래밍 된 알파고의 수는 분명히 인간의 시선에서 가늠하기 힘든 수였다.
본지에 관전평을 연재하는 손종수 시인은 "알파고의 괴수, 악수, 실수, 이상한 수들은 모두 중반 이후 한 수 이상의 가치를 드러내면서 알파고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평했다.
이세돌 9단은 처음 3국을 연이어 내줬다. 그러나 그는 각각의 대국에서 변화를 꾀했다. 초반 5전 전승을 자신하기도 했던 그는 1, 2국을 거치며 달라졌다. 1차전에서 변칙과 도발로 알파고의 실력을 가늠하고자 했다면 2차전에서는 두터운 바둑을 뒀다. 3차전에서는 '패배'가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생각지 못한 패를 두면서 알파고를 상대로 실험했고 4차전엔 마침내 알파고도 예상치 못한 '신의 한 수'(78수)를 두면서 승리를 거뒀다.
그의 바둑에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위기십결'(圍碁十訣)이 녹아있다. 수십만개의 기보만을 기계적으로 학습한 알파고엔 없는 '바둑의 철학'이다.
위기십결은 중국 북송시대 반신수라는 인물이 지어 태종에게 헌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단순히 바둑에서 승리하기 위한 작전을 넘어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담은 위기십결을 소개한다.
첫째, 부득탐승(不得貪勝)이다. 이기려는 목적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바둑을 그르치기 쉽다는 말이다. 두번째는 입계의완(入界宜緩)이다. 상대의 세력에 뛰어들 때는 무리해서 깊게 뛰어들지 말고 완만하게 들어가라는 말이다.
이어 공피고아(攻彼顧我)다. 상대를 공격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점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넷째 기자생선(棄子爭先)은 돌 몇 점을 버리더라도 선수를 잡아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작은 것에 연연해 대세를 그르치지 말라는 사소취대(捨小就大)도 있다. 때론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여섯째는 봉위수기(逢危須棄)다. 위험에 처해 있는 돌은 살리려고만 하지 말고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속단하지 않고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신물경속(愼勿輕速)이다. 돌을 움직일 때 주위의 돌과 호응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동수상응(動須相應)이다.
피강자보(彼强自保)는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자중하고 자신을 보강하는 것이 바둑의 이치에 맞는다는 격언이다. 마지막 세고취화(勢孤取和)는 세력이 빈약한 경우 분란을 일으키려 하지 말고 타협을 통해 안정하라는 뜻이다.
이세돌 9단이 그 치열한 수 읽기에서 특정 경구를 떠올렸을 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강인한 정신력의 바탕에는 천재적 수 읽기 외에 그만의 바둑 철학이 깔려 있을 것이다. 반면 알파고는 바둑만 아는 프로그램인 동시에 바둑을 모르는 인공지능(AI)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