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레고랜드발(發) 자금경색 사태에 대응해 추가 대책으로 당초 내년초로 예정된 '은행간 차액결제 이행용 담보증권 제공비율'(이하 차액결제 담보비율) 인상 일정을 미루고 70%로 당분간 동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경우 시장에서 유동성이 약 5조원 덜 사라지는 효과가 생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은은 시장 일각에서 요구하는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금융안정특별대출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 설립 등은 대규모 유동성이 시장에 풀린다는 점에서 당장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26일 정부와 관련 기관에 따르면 한은은 오는 27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대출 적격담보 및 차액결제 담보 증권의 범위 확대와 함께 차액결제 담보비율 인상을 늦추는 방안도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이 차액결제 담보비율 인상을 유예할 경우 자금경색 완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각 시중은행은 매일 오전 11시 보유계좌간 발생한 이체거래를 합산해 차액을 정산하는데 이를 은행간 차액결제라 한다. 각 은행들은 유동성 부족으로 차액결제가 불이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은이 정하는 차액결제 담보비율에 따라 담보증권을 맡겨야 한다.
한은은 코로나19(COVID-19) 팬데믹(대유행) 초기인 2020년 4월 차액결제 담보비율을 기존 70%에서 50%로 내린 바 있다. 이에 따라 약 10조원 규모의 추가 유동성이 공급되는 효과가 발생한 바 있다. 한은은 지난 2월 이 비율을 70%로 다시 올렸으며 국제기준(PFMI, 금융시장인프라에 관한 원칙)에 따라 2023년 80%, 2024년 90%, 2025년 100%로 올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통화당국이 최근 자금경색사태 등을 고려해 일정을 연기, 내년 80%로 인상이 예정된 차액결제 담보비율을 70%로 유지할 경우 약 5조원의 유동성 축소 효과가 사라질 전망이다.
아울러 한은이 당초 발표한대로 적격담보 대상 증권에 은행채, 공공기관채를 추가하면 금융기관들은 해당 채권을 한은에 담보로 주고 자신들이 맡겼던 국채, 통화안정증권(통안채) 등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한은이 이 같은 조치를 취하는 것은 레고랜드 사태를 계기로 회사채 시장의 어려움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3년물 회사채(AA-)와 국고채 금리차를 나타내는 신용스프레드는 지난 1월3일 0.605%포인트에서 전일 1.307%포인트로 두배 넘게 확대됐다. 신용 스프레드가 확대됐다는 것은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 부담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다.
한편 한은은 금융투자업계 등이 요구한 무제한 RP 매입, 금융안정특별대출, SPV 등은 현 단계에선 시행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조치들은 시장에 대규모 유동성이 풀리는 효과를 낳는데, 빅스텝(한번에 0.5% 기준금리 인상)까지 단행하며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을 잡으려는 현재 통화정책 기조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는 "SPV는 대출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중앙은행 돈이 (시장에) 나간다"며 "현재 긴축기조와 완전히,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국은 해당 조치를 시행하는 경우 외국인 투자자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금융시장이 위기에 빠졌다고 오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당장은 추가 대책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지난 23일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를 거쳐 확정한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이 실제 집행되는데 시간이 필요하고, 이에 따른 시장 영향을 확인해야 추가 대책 마련이 필요한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시장에 과도하게 유동성을 공급할 경우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유사시 활용 가능한 '정책카드'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정부가 지난 2020년처럼 유동성 공급 규모를 100조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2020년 3월 19일 50조원 규모 '민생·금융안정 패키지 프로그램'을 발표한 후 닷새 만인 같은 달 24일 지원 규모를 100조원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2차 프로그램을 공개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현재의 상황이 당시만큼 위급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
기획재정부 고위관계자는 "코로나 사태 초기엔 순식간에 모든 시장이 동시에 얼어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사실상 무제한으로 유동성을 공급했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다"며 "일단 50조원대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 시행에 따른 시장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아직 그 다음 단계(추가 대책 추진)는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