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신호등은 켜져야 한다

최민경 기자
2026.03.26 05:00
(서울=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2.26/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경제부처를 출입하면서 가장 답답한 순간은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브리핑을 들을 때다.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아무 방향도 제시하지 않는 소통은 오히려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운다.

한국은행의 커뮤니케이션은 달랐다. 수장이 분명한 메시지를 내놓으면 시장은 그 신호를 기준으로 움직였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기억할 한 단어로 '신호등'을 꼽고 싶은 이유다.

이 총재는 취임 후 조건부 3개월 포워드가이던스(기준금리 전망)를 도입하고 최근에는 6개월 점도표 방식으로 확대하며 중앙은행의 역할을 "신호를 켜주는 것"으로 규정했다.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선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한은이 비난이 두려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 신호등 없이 시장이 움직이는 것"이라며 적극적인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포워드가이던스 도입 초기에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에도 "전망이 달라지는 걸 보고 중앙은행이 금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시장에 신호등을 켜주자는 것"이라고 했다. 중앙은행은 판단만 내리는 게 아니라 시장이 판단할 수 있는 기준도 제시하는 기관이라는 철학이었다.

포워드가이던스와 점도표, 적극적인 기자간담회는 금리 경로를 못 박기보다 상황에 따른 대응 원칙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변동성이 커질수록 시장이 원하는 것도 이 같은 예측 가능성이다.

차기 총재로 낙점된 신현송 전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은 포워드가이던스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시장은 단순한 메시지만 받아들이고 조건부 설명은 무시되기 쉽다는 점, 중앙은행이 많이 말할수록 정책 유연성이 줄어든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불확실성이 큰 환경에서 포워드가이던스가 사전 약속처럼 받아들여질 경우 중앙은행의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보 비대칭이 큰 한국 시장에서 중앙은행의 침묵은 공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시장이 스스로 해석해야 하는 영역이 커질수록 변동성은 오히려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포워드가이던스는 미래를 예견하거나 약속하는 장치가 아니라 중앙은행의 판단 기준을 공유하는 소통의 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총재가 바뀌더라도 이 자산은 이어질 필요가 있다. 정책 유연성을 유지하되 시장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소통은 지속돼야 한다. 중앙은행의 메시지는 불확실성을 관리하기 위한 책임 있는 신호다. 안개가 짙을수록 신호등은 켜져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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