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유리가 새로운 얼굴을 꺼내 들었다. 우리가 알던 소녀시대 유리는 없었다. 배우라는 타이틀, 그리고 ‘침범’이라는 작품 속 권유리는 온전하게 캐릭터로서 본 적 없는 낯빛을 내놓았다. 무대 위에서 윤기 나던 피부는 버석하게 보일 만큼 거칠었고, 생기 가득했던 두 눈은 텅 비다 못해 냉소로 가득했다. 관객으로 하여금 “권유리가 나오는 작품은 궁금하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다는 바람은 ‘침범’을 통해 단추를 잘 끼운 듯하다.
‘침범’은 기이한 행동을 하는 딸 소현(기소유)으로 인해 일상이 붕괴하는 영은(곽선영)과 그로부터 20년 뒤 과거의 기억을 잃은 민(권유리)이 해영(이설)과 마주하며 벌어지는 균열을 그린 심리 파괴 스릴러물이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띠는 평범하지 않은 유치원생 소현, 이로 인해 일상이 망가져 가는 엄마 영은, 불행했던 어릴 시절 트라우마로 사람을 잘 믿지 않는 민, 늘 밝게 웃고 있지만 어딘가 의뭉스러운 해영. 영화는 네 인물의 감정선과 두 시대 배경으로 서사를 펼친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누가 소현일까?’하는 궁금증을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이 정말 좋았어요. 인간의 본질적인 기질에 관해 물어보는 이야깃거리도 흥미로웠고요. 또 그 안에 모성애가 있고, 같은 여자로서의 입장과 그런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 성장한 모습, 그로 인해 버려진 상처 등 그 각각의 캐릭터마다 다른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한데 엮어서 이야기를 펼친 게 재밌었어요.”
권유리가 ‘침범’에서 연기하는 민은 어릴 적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 이후, 사람을 믿지 않고 경계하며 마음의 벽을 허물지 않는 인물이다. 가장 사랑받아야 할 존재인 부모와 연인에게 가장 커다란 상처를 받고 냉소와 악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민의 일상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직장은 물론 자신을 자식처럼 챙겨준 현경(신동미)과의 관계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해영. 민은 이 불쾌한 침범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점진적으로 보여준다.
“민은 기구한 삶을 살아서 태도가 냉소적이고 좀 차가워요. 두 감독님과 충분한 의견을 나누면서 촬영해서 그전에 생각한 미션들은 다 해냈던 것 같아요. 소현이 누구일지 후반부까지 궁금증을 팽팽하게 끝까지 가지고 간다면 민으로서 의무를 다한거로 생각했는데 60%는 한 것 같아요.”
‘침범’은 한 번의 시점 변화가 있다. 민과 해영의 등장은 ‘20년 후’ 시점이다. 영화는 두 인물 중 누가 20년 전 영은의 삶을 붕괴했던 섬뜩한 어린아이 소현인지를 쫓으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소현에서 20년 후로 점프 됐을 때 민이가 바로 비치잖아요. 그때 첫 모습이 소녀시대 유리가 매칭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좀 더 거칠었던 민의 삶이 화면에 고스란히 담기길 원했거든요. 그래서 잘 정리돼 있는 저의 기존 모습과는 다른 최대한 날것의 거친 모습이었음 했어요. 그래서 일자 앞머리를 잘라서 얼굴을 답답할 만큼 많이 가렸고, 피부결도 거칠게 표현했어요. 해영과 팽팽한 긴장감 형성을 위해서 몸무게도 5kg 증량했고요. 그런데 오히려 예쁘게 외관이나 행동을 꾸미지 않아도 돼서 편했어요(웃음).”
확실하게 ‘침범’ 속 권유리의 얼굴은 낯설다. 그리고 이 때문에 눈길과 마음을 더 내어주게 된다. 권유리는 “‘침범’은 되게 기다렸던 장르고 역할이었다. 좀 더 자유로운 부분이 있었다. 기존에 해왔던 작품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를 느꼈다. ‘침범’이라는 작품으로 저 자신에게서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사실 ‘침범’과 ‘가석방 심사관 이한신’을 동시에 찍었다. 두 작품 모두 무리해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게 소녀시대 이미지가 강하게 있음에도 새로운 이미지를 입혀주려는 용기를 갖고 계신 분을 찾는 게 쉽지가 않다. 저한테 그런 시나리오를 준다는 게 무척 반갑고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침범’ 주연배우 모두가 여자라는 점에서도 요즘 보기 드문 희귀한 영화잖아요. 그래서 배우끼리도 잘 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여자 위주로 서사를 펼치는 영화 시나리오가 귀해요. 그래서 이 작품이 더 관심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영화 속 이야기가 어릴 적 한 번쯤은 느껴봤을 법한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소현의 기이한 행동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잖아요. 제가 아직 부모는 아니지만 이해하는 지점이 있어요. 그리고 모성과 본성의 관념에 대해 고민하고 물어보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권유리에게 ‘침범’은 “터닝포인트”이자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준 작품이다. 불같은 분노와 서늘하고 미묘한 감정선을 처음으로 연기하며 “나도 이런 걸 할 줄 아는구나”를 깨달았고, 그래서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확신을 얻었다.
“‘침범’ 덕분에 용기가 생겼어요. 예전엔 ‘왜 나한테는 이런 작품이 안 들어올까?’ 조바심이 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때는 이런 걸 소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경험과 세월을 조금이라도 더 쥔 이제야 소화할 수 있게 된 역할 같아요. 그렇게 만난 ‘침범’에서 저도 보지 못한 제 얼굴이나 감정을 느끼면서 ‘좀 더 과감하게 많이 도전해 봐도 되겠다’, ‘나 그래도 되는 배우일 수 있겠다’ 하는 용기가 생겼어요. 저를 재밌게 많이 활용해 주시면 좋겠어요.”
권유리는 ‘침범’으로 용기를 얻고 앞으로 힘 있게 나아가는 길목에서 “주특기가 있는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싶다고 밝혔다.
“배우로서 청사진을 말하자면 어느 날은 김혜수 선배님, 제니퍼 로렌스 같은 많은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고, 또 어느 날은 지긋한 나이까지 매체와 연극을 오가며 계속 쓰임 받는 것에 기뻐하면서 연기하시는 신구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고 그래요. 그렇게 저만의 주특기가 있어서 어디서든 활약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걸 찾기 위해서 꾸준히 연기하고 싶어요. 나이 들어서도 많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