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태어난 1958년만 해도 한국은 가나, 말레이시아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국가가 됐습니다. 이런 성과를 이룬 국내 기업들의 기업가정신을 아세안 신흥성장국들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려 합니다."
지난 6월 전 세계 70개국의 중소기업 정책기관 및 연구단체들이 참여하는 세계중소기업협의회(ICSB) 회장으로 취임한 김기찬 가톨릭대 교수는 1년간의 임기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구상을 이같이 밝혔다.
김 회장은 대표적인 협력 방안으로 ‘아시아판 에라스무스' 모델을 언급했다. 유럽 내 대학 교류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프로젝트’ 처럼 아세안 기업간 교육네트워크를 구축, 관련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면, 학위나 인증을 수여하겠다는 포부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 직후 아시아를 방문한 것처럼 세계 경제가 아시아 시장을 주목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는 '고 웨스트'(Go West)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담=송정렬 중견중소기업부장, 정리=김하늬 기자, 사진=이기범 기자]
-대한민국도 저성장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이른바 대기업, 제조중심의 기존 경제구조로는 성장의 한계점에 왔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현재 대한민국 경제구조를 어떻게 진단하는가.
▶우리 경제는 2011년을 기점으로 저성장기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경제성장률은 2%대로 떨어졌고, 잠재성장률도 3%선까지 추락했다. 미래 전망도 밝지 않습니다. 한국은행은 지난 7월 올해 경제성장률을 당초 3.5%에서 2.8%로 하향조정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의 주원인은 우리 기업들이 해외 시장 개척을 두려워하고 국내에 안주하고자 하는 ‘갈라파고스 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중소 제조업체의 수출 비율은 2005년 16.4%에서 2011년 13.2%로 줄었습니다. 세계시장에 도전하지 않는 중소기업의 위기현상은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세계화에 실패한 기업은 사업구조가 취약해지고 혁신역량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1990년대 시작된 일본의 장기 경기침체인 '잃어버린 10년' 초기 모습과 무척 닮았습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다시 한 번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어떤 형태로의 변화가 요구되는지.
▶성공적인 중견·중소기업 모델로 독일의 히든챔피언과 일본의 교토식 경영이 꼽힙니다.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의 '히든챔피언'과 일본 스에마쓰 교수의 '교토식 경영'이 말하는 중견·중소기업 성공의 비결은 혁신이고, 그 혁신의 동력은 바로 '시장'에 있습니다.
국내 잘 알려진 히든챔피언 대신 교토식 경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세계 콘덴서 시장을 제패한 일본 전자부품 메이커 무라타, 세라믹 전자제품 분야 세계 1위인 교세라,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기부문 세계 1위 기업인 일본 호리바제작소 등은 모두 교토에 터를 둔 기업입니다. 이들 '교토 기업'은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6.7%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쿄, 오사카 등 다른 지역보다 7배 이상 높은 이익을 실현했습니다. 이는 교토 기업들은 일본 내수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 수출 판로를 넓히는 데 가장 심혈을 기울인 덕분입니다.
우리 중견·중소기업도 이처럼 저성장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그 전략은 △글로벌 마켓 △니치 마켓 △테크놀러지 등 3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세계 시장을 무대로 하되, 기술력에 맞는 틈새시장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합니다.
- 박근혜 정부도 중소기업 육성과 지원 정책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임기 반환점을 앞두고 있는데 그동안의 정책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내수 경제의 침체가 길어지면서 중소기업 정책이 한계기업을 달래주는 쪽으로 많이 치우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계에 내몰린 기업이 문을 닫지 않도록 적당히 지원해 고용과 가계를 유지할 수는 있게 끔 해주는 일종의 '복지정책'인 셈입니다. 또 한 가지는 벤처·창업정책이 조금은 과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벤처는 국가에 새로운 화두를 던질 수 있지만 거품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벤처정책과 별개로 기존의 기업들을 다시 키우는 '재창업'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정부는 더 이상 '기업 지원 정책'을 확대할 게 아니라 '시장 발굴 정책'에 관심 가져야 합니다. 현재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정책은 70~80년대 경제개발시기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회사는 있는데 돈이 부족하고, 인력이 부족해 정부가 자금과 고급인력을 수혈해 마중물 역할을 하는 방식입니다. 이제는 기업이 해외 시장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개척할 수 있도록 인프라와 정보를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다 보면 미국이나 일본의 공무원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직접 해외 현지 시장조사, 네트워크 관리, 애로사항 해결 등을 위해 대거 파견됐습니다. 공무원들은 그 나라의 크고 작은 산업계 행사나 모임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밉니다. 그 결과는 실질적인 사업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20년 일찍 민·관 협동모델을 통해 동남아 시장에 적극 진출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베트남, 미얀마의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전력 산업단지 등 산업기반시설(SOC)에 대대적으로 투자함으로써 이를 자국 기업들의 현지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이런 방식을 통한 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고민해야 합니다.
-사실 여전히 상당수 중소기업이 정부지원에 목을 매고 있다. 우리 중소기업들의 역량이 해외시장에서 통할 수 있겠는가.
▶우리 중소기업의 잠재력은 뛰어납니다.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우수한 협력업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현대차나 삼성전자의 협력업체들은 글로벌시장에서도 상위 30% 이내에 드는 우수한 기업들입니다. 이런 우수 중견·중소기업의 수를 늘리는 일종의 '엘리트식 육성' 정책을 별도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340만개의 중소기업에 모두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역량이나 기술을 기대하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한 해 17조에 달하는 연구개발(R&D)비를 쏟아 붓고 있지만 투입 대비 생산성이 낮고, 중소기업이 제대로 된 성과를 보지 못하는 'R&D 패러독스'를 경계해야합니다. 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공급자 중심에서 벗어나 시장 관점으로 혁신해야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출국의 수요를 먼저 파악한 후, R&D를 통해 그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 나가는 시장 중심 정책으로 변해야 합니다. 기업 중에도 R&D투자를 매출액 대비 4% 이상 하는 기업 혁신형(이노비즈) 기업에 우선적으로 해외 진출 교두보를 마련해주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독일의 히든챔피언, 일본의 교토경영에 대응할만한 한국형 '이노비즈 기업'을 많이 육성해야합니다.
-지난 6월 세계중소기업협의회(ICSB) 신임 회장자리에 올랐다. ICSB는 어떤 조직이며,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는가.
▶ICSB는 전 세계 70개국의 중소기업 정책 및 연구기관들이 중소기업 정책과 학문적 연구를 공유하는 단체입니다. 1955년 처음 설립될 당시에만 해도 미국과 유럽 주도의 학회였습니다. 점차 참여 국가가 늘고 학계뿐만 아니라 나라별 중소기업 지원 정부기관이나 협단체와도 함께 하면서 현재 모습으로 커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소기업관련 학회와 교수를 비롯해 중소기업중앙회, 중소기업진흥공단, 신용보증재단, 기술보증재단 등 중소기업 지원 기관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습니다. ICBS는 오늘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등에도 참석해 목소리를 내는 유력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ICSB 회장으로서 1년의 임기 동안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우리 기업가정신의 성과를 신흥성장국들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ICSB 활동이 가장 부족한 곳 중 하나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지역입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등의 나라에서 ICSB 활동을 강화하고 ASEAN과의 협력관계가 활성화되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지난 6월부터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의 한국식경영연구소(KMI,K-Management Institute)에서 한국 기업의 ‘압축성장 신화’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를 통해 한국기업의 경영방식과 역사 등을 연구할 계획입니다.
또, 내년에는 국제연합(UN)에서 글로벌 컨퍼런스를 열고 대부분의 국가가 안고 있는 '저성장의 해법으로서 중소기업과 기업가 정신'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할 계획입니다. 이 자리에서 보다 따뜻한 사회를 위한 기업가정신을 정립할 계획입니다. 기업가정신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진화시키는 가장 큰 힘입니다. 개인을 위한 기업가 정신이 1.0이었고, 기업을 위한 기업가 정신이 2.0이었다면, 사회를 위한 기업가 정신이 3.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