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왜 '해외투기자본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얻어야 하는 겁니까. 최소한의 방어 장치가 필요합니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어쏘시어츠LP가삼성물산과제일모직의 합병에 반기를 들며 공세를 이어나가는 데 대한 재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탄식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게 바로 '포이즌필'(Poison Pill)이다. 적대적 매수자가 등장할 경우 그를 제외한 모든 주주들이 할인된 가격으로 신주를 얻을 수 있는 제도다. 적대적 매수자에게 마치 '독약'과 같은 효과를 낸다는 뜻에서 인상적인 이름이 붙여졌다.
포이즌필은 미국이나 일본·프랑스 등 다수의 선진국에서 오래전부터 도입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없다. 당초 1990년대 후반 IMF 이후 자본시장이 본격 개방되면서 포이즌필의 필요성이 일부에서 제기됐지만 소수의견에 그쳤다. 기본적으로 '재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결국 소수의 지분으로 경영권을 가진 대기업 오너들의 특혜로 돌아가지 않겠냐는 게 반대론의 요지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 '기업 프렌들리' 정책 기조와 맞물려 포이즌필 도입이 추진되기도 했다. 상법 개정안이 2010년 3월 국무회의까지 통과했지만 결국 국회에서 가로막혔다. 당시 야권과 시민단체는 대기업들이 순환출자 등으로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적대적 M&A(인수합병)에 노출될 위험이 적다며 강력 반대했다. 또 오너의 지배권이 외부 견제 없이 더욱 공고해져 남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경제민주화'라는 큰 태풍이 우리 경제계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면서다. 재계에서는 "경제민주화 입법으로 신규순환 출자가 금지됐고 일감몰아주기 규제가 도입되는 등 오너의 지배권 남용을 막기 위한 많은 제도들이 시행됐기 때문에 포이즌필 도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헤지펀드들의 투기적 행동주의는 더욱 치밀하고 교묘하게 진화한 상태다.
무작정 포이즌필을 도입하자는 게 아니다. 한국의 변화된 실정에 맞게 합리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어느 방향이 다수의 주주, 더 나아가 우리 경제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있을 지 한번 짚고 넘어가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