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산업박람회 중 하나인 독일 하노버 산업박람회(Hannover Messe·하노버 메세). 지난달 23일 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하노버 전시장(Fairgrounds Hannover)에 들어서자 전세계에서 몰려든 인파가 전시장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많은 부스 중에서도 유독 사람들의 발길이 오래 머문 곳은 AI(인공지능)가 두뇌역할을 하는 공정과 로봇 전시구역이었다. AI가 소프트웨어 화면 안에 머물지 않고 공장과 로봇, 공급망이라는 물리적 세계로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 전시장 곳곳에서 확인됐다.
◇내 발에 맞는 러닝화를 '대량생산'으로=AI가 실제 제조현장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확인하려는 열기로 가득했던 곳 중 하나가 독일의 대표 기업 지멘스 부스였다. 지멘스 부스 한가운데에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색 러닝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서는 투명하고 촘촘한 격자구조의 러닝화 중창(midsole)이 3D(3차원)프린터에서 천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지멘스가 선보인 공정은 그동안 공존하기 어렵다고 여긴 '개인 맞춤형'과 '대량생산'이 한 공간에서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관람객이 검은색 패널에 올라서면 센서가 체중분산과 발의 아치모양을 정밀하게 읽어낸다. 화면에는 개인별 발 모양과 압력분포가 일종의 '디지털 지문'처럼 나타난다. 이 데이터는 곧바로 설계시스템으로 넘어가고 3D프린터는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위한 중창을 만들어낸다.
신발밑창처럼 규격화된 부품은 기존 방식대로 대량생산하되 착화감을 좌우하는 핵심부품인 중창은 금형 없이 그때그때 찍어내는 방식이다. 같은 생산라인에서 수천 명의 서로 다른 발에 맞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대량생산의 효율성을 유지하면서도 개인 맞춤형 제품을 구현하는 '유연한 공장'의 모습이다.
여기서 AI는 단순히 정해진 명령을 반복하는 기계가 아니다. 설계, 생산계획, 물류제어 등 서로 다른 시스템을 하나로 묶어 판단하고 실행하는 '에이전틱 AI'로 작동한다. 지멘스의 사라 브라운 연구원은 로봇이 물건을 집다 실수로 넘어뜨려도 스스로 상황을 판단해 다시 세우려 시도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이전에 자동화하기 어려웠던 영역까지 AI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설명했다.
◇"수요급증, 대응 가능해?"…데이터와 대화하는 공장=또다른 독일의 대표 기업 SAP 부스에서는 AI가 공급망 전체를 조율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SAP는 독일 발도르프시 자사 부지에 구축한 실제 공장을 실시간 화면으로 연결해 공장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AI가 어떻게 읽고 판단하는지를 보여줬다.
부스에 전시된 로봇은 공장을 돌아다니며 카메라와 센서로 설비온도를 측정하고 이상징후를 감지한다. AI는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무엇이 정상 상태인지 학습하고 부품고장이 예상되면 사람이 알아채기도 전에 다른 공급업체에 알림을 보내 미리 부품을 주문한다. 고장이 난 뒤 멈춰서는 공장이 아니라 고장 가능성을 미리 감지해 움직이는 공장이다.
말리키 마틴 SAP 어드바이저는 "이제 사용자가 복잡한 화면을 조작할 필요 없이 챗GPT처럼 데이터와 대화하며 공장을 운영하는 시대가 왔다"고 했다. 예컨대 AI비서에게 "제품수요가 급증했는데 대응 가능한가"라고 물으면 AI가 재고와 생산능력, 공급망 상황을 종합해 가능한 대응방안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AI, 마케팅 문구 넘어 '물리적 실체' 되다=박람회를 주최한 도이체메세의 후베르투스 폰 몬샤우 무역박람회 및 제품관리 총괄이사는 올해 행사의 핵심을 "산업 전반에 걸친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의 AI가 마케팅용 수식어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산업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며 "AI는 이제 산업이 됐다"고 말했다.
그가 짚은 변화의 축은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엔터프라이즈 AI'다. 기업 내부의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최적의 판단을 내리는 두뇌역할이다. 공장현장이나 사무실에서 비행기의 부조종사처럼 사람의 업무를 실시간으로 보조하거나 AI비서가 돼 복잡한 공정을 스스로 판단하고 조율하는 기술이다.
두 번째는 '피지컬 AI'다. AI라는 두뇌에 로봇이나 자율주행차량 같은 신체를 부여해 실제 현장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기술이다. 폰 몬샤우 이사는 "디지털 세계의 지능이 실제 공장의 로봇, 자율주행차량과 상호작용하기 시작했다"며 "피지컬 AI는 앞으로 5년에서 20년 사이 하노버 메세의 핵심주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람회 자체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고 폰 몬샤우 이사는 짚었다. 그는 "인터넷만으로도 정보는 충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올해 전시부스 외에 마스터클래스, 라운드테이블 등 참여형 프로그램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장에서 직접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는 과정은 대체 불가능한 가치"라고 덧붙였다.
하노버 메세는 1947년 독일의 산업역량을 소개하기 위해 시작됐다. 올해는 '기술의 다음을 생각하다'(THINK TECH FORWARD)란 슬로건을 걸고 지난달 20일부터 24일까지 열렸으며 약 3000개 기업이 참가했다. 방문객은 11만명가량, 이 중 약 40%가 독일 외 지역에서 찾아온 것으로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