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법정에 서기 전 기업은 이미 유죄 선고를 받았다

지영호 산업2부장
2026.09.09 04:00

'나쁜 기업' 낙인에 경영 위축 불가피
법정서 누명 벗어도 명예 회복 어려워
세지는 제재수위, 당국 책임도 커져야

정진욱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국장이 2020년 7월29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업집단 SPC 계열회사들이 SPC삼립을 장기간 부당지원한 행위에 시정명령과 과징금 647억원을 부과하고 총수와 경영진, 법인을 고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뉴시스)

소비재 소비자의 행동은 즉각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자영업자가 몸살을 앓던 때다. 아침빵을 사러 단골 빵집에 들르려하자 아내가 다른 곳으로 갈지 물어본다. "오너일가 배만 채워주는거 아니냐"면서. 해당 기업은 총수일가 경영권 승계를 위한 계열사 부당지원으로 논란이 있었다.

사건의 출발은 2020년 공정거래위원회가 SPC그룹(현 상미당)에 647억원의 과징금 폭탄을 안기면서다. 계열사들이 7년간 경영승계에 유리한 삼립을 거래 중간에 끼워 넣어 414억원의 이른바 '통행세'를 챙겨줬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기업의 내부거래 부당지원 과징금 중 최대 규모이자 공정거래 관련법 13개를 위반한 금호아시아나 사례보다 2배 많았다. 허영인 회장이 아내에게 상표권을 넘겨 213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는 배임혐의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 판단을 내린 직후였다. 누명을 벗자 새로운 족쇄가 채워졌다.

SPC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통행세 관행을 비판하는 여론은 맛이 없으면서 지나치게 비싸다는 품질, 가격논쟁으로 번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서울고법은 2024년 공정위의 처분을 취소했고,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공정위가 '부당지원'이라고 규정했던 거래의 법적 성격을 법원이 뒤집은 것이다.

판결이 나오기까지 4년 동안 SPC에 따라다니는 이미지는 처참했다. '총수일가 사익편취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은 물론이고 2022년 평택 SPL 노동자 사망사고를 비롯한 산업재해, 노조 갈등 등이 잇따르면서 불매운동의 표적이 됐다. 평판은 곤두박질쳤고 삼립 주가는 10년여만에 최고가 대비 10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생필품 시장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경제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이다. 인건비가 오르고 원재료 가격이 뛰어도 물가인상의 주범이란 낙인때문에 인상분을 소비자가격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결과는 영업이익률로 나타난다. 반도체 기업이 70%를 넘나들 때 식품 기업은 1% 사수하느라 정신없다. 삼립의 2분기 영업이익률은 0.01%다.

심각한 것은 해마다 높아지는 규제당국의 처벌 수위다. 2021년 공정위는 삼성웰스토리에 부당지원 과징금을 2349억원으로 때렸다. SPC에 부과한 최대규모 부당지원 과징금을 1년만에 3배 이상 상향시킨 것이다. 기업의 성장속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힘만 잔뜩 들어간 방망이에 좋은 타구가 나올리 없다. 지난 4월 서울고법은 공정위의 결정에 대해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올해 공정위는 설탕·밀가루·전분당 담합으로 1조8000억원의 과징금을 매겼다.

과징금 환급 규모가 커지는 것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순환급액은 지난해 698억원에서 올해 7월까지 1065억원을 넘어섰다. 기업에 먼저 돈을 걷었다가 법원의 판단이 결정이 바뀔때 돌려주는 비용이다. 환급에는 가산금이라는 비용도 따라붙는다. 재원은 국민의 세금이다.

규제당국의 역할을 축소시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장에서 힘을 가진 기업의 불공정행위를 제재하고 경쟁 질서를 지키는 것은 규제기관의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엄벌이 좋은 행정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은 법원 문턱을 넘기도 전에 유죄가 되고 몇 년 뒤 무죄에 가까운 판단을 받아도 치른 대가를 돌려받지 못한다. 잃어버린 사업 기회와 신뢰회복은 오롯이 기업이 짊어져야 할 짐이다. 더구나 과징금 규모가 클수록 잘못된 제재가 초래하는 경제적·사회적 비용도 커진다. 과징금 규모가 늘어날수록 규제당국의 책임도 무거워진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지영호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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