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시평] 신념과잉의 시대

손동영 기자
2015.03.20 07:07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걷는 상상을 해보자. 방향도 분간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대응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길을 따라가거나 자신의 판단을 믿고 홀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들도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면 자신의 신념만을 붙잡고 가는 수밖에 없다. 이제 타인의 소리는 잡음이 된다. 귀를 막고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한다.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면 신념은 확신으로 바뀌고 그렇게 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강한 연대를 형성한다.

바야흐로 신념과잉의 시대다. 모든 게 불확실한 환경에서 자신의 신념만을 붙잡고 가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미국대사에게 테러를 가한 사람은 한·미 군사훈련이 한반도 긴장의 원인이라는 신념으로 일을 벌였다. 특정 정치집회가 종북성향을 띤다는 판단으로 고등학생이 황산테러를 가한 것은 또 어떠한가. 한 지방자치단체장은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데가 아니다’라는 신념(?)으로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를 대놓고 조롱하고 버젓이 불법을 행하고도 종교적 신념을 방패삼아 떳떳해하며, 사소한 일로 비행기를 되돌리는 수준의 갑질을 행한 재벌 3세도 억울함을 호소한다. 모두가 옳은데도 모두가 억울한 세상. 사회적 판단기준을 상실한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신념은 환경의 불확실성과 함수관계를 이룬다.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은 내면으로 회귀한다. 신념이 강해질수록 대화는 거추장스런 짐으로 인식되고 결국 커뮤니케이션 감소로 이어진다. 강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자신만의 길을 표방하는 정치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환경의 불확실성이 증가한 징후로 보아야 한다.

‘신념의 정치인’ ’준비된 리더’ 선거철이 되면 늘 등장하는 상투적 표현의 이면에는 언제나 함정이 숨어있다. 선거 때면 연신 고개를 숙이던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면 대화의 문을 걸어잠근다. 확고히 정해진 방향은 더 이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이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신념으로’ 추진된 갖가지 정부정책이 야기한 문제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마구잡이로 파헤쳐진 국토는 이제 얼마나 걸려야 되돌릴지 가늠할 수도 없고 잘못된 투자로 날아간 혈세는 천문학적 규모에 이른다. 교육관료들의 ‘신념’과 탁상행정으로 시도때도 없이 바뀌는 정책으로 인해 교육환경은 이미 누더기가 된 지 오래다. 한 명의 인재를 키워내는 데는 오랜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지만 너무나도 가볍게 바뀌는 제도로 인해 학생들은 한 번 쓰고 마는 실험실 쥐처럼 취급받는다.

경제환경을 개선하고 교육환경을 개혁한다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현장의 경제주체나 교육주체들의 목소리는 잡음으로만 인식되는 듯하다.

존경받는 건축가인 스위스의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무엇을 배려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자신만을 더 높이 더 크게 드러내려는 나르시시즘적 건축이 우리의 도시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어왔던가.

이제 필요한 것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배려와 소통에 대한 고민이다. 한국 정치인의 신뢰도가 우간다보다 낮다고 한다(우간다 정치인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다). 이제 다시 대화에 나설 시점이다.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있다면 되도록 많은 이와의 대화를 통해 가다듬어야 하지 않겠는가.

불확실성의 늪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는 강한 돌파력이나 신념보다 배려의 커뮤니케이션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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