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인 카불에 진입하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해외로 탈출했다. 아프간 정부의 붕괴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미군 철수가 시작된 이후 아프간 정부의 몰락과 탈레반의 재집권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속도가훨씬 빨랐다. 미국이 2조2600억달러를 들여 20년 동안 진행한 전쟁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게 됐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진출로 시작된 21세기 중앙아시아 세력지도는 이제 다시 그려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아프간 주둔은 지역 전체에 안정을 가져왔다. 심지어 중국, 러시아, 이란 등에도 미군의 주둔과 탈레반과의 지리한 전쟁은 자신들이 고민해야 할 골칫거리를 미국이 대신 떠안은 듯한 효과를 가져왔다. 미국의 철수와 탈레반의 재집권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됐다.
탈레반은 기존 집권세력에 대한 관용과 협력 의지를 내비치면서 과거에 비해 온건해졌고 합리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과 만남을 통해 세력확대의 뜻이 없으며 아프간의 재건과 발전, 그리고 주변국과의 협력을 통한 지역의 안정이 최우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교조적인 종교적 신념을 토대로 외세축출을 내걸고 20년 동안 큰 희생을 거치면서 전쟁을 해온 탈레반이 정말 이러한 협력과 온건함을 유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탈레반은 하나의 세력으로 간주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종파와 세력이 존재하며, 탈레반 지도부가 이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일부 세력의 과격화, 테러집단과의 연계 등은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우 내전발발은 다시 한번 대규모 난민사태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전파를 초래하며 주변 지역의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프간과 폭 76㎞의 와한회랑을 통해 국경을 접하는 중국은 이러한 사태를 우려해 왕이 외교부장의 아프간 접경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 및 탈레반과 직접 협상에 나섰다. 러시아도 연방 내 이슬람계 공화국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면서 우즈베키스탄 등과 군사훈련 등을 진행한다. 이미 수십만 명의 아프간 난민이 거주하는 이란 역시 아프간의 혼란으로 인한 추가 난민유입과 이로 인한 내부 갈등확대를 우려한다.
미국은 국가적 위신의 추락을 감내하고라도 철수한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결정을 통해 그동안 미국이 짊어졌던 여러 위험요소를 주변 국가에 떠넘겼다. 과연 이러한 결단이 중국 등에 새로운 부담과 어려움을 가져올지, 아니면 중국-러시아-이란으로 연결되는 유라시아대륙 중심부의 세력연합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의 바다를 통한 압박을 돌파하는 중국의 새로운 활로가 될지는 앞으로의 시간이 결정할 것이다.
다시 한번 시작된 강대국의 그레이트 게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국가간 세력관계는 짧은 시간에 큰 변화를 겪을 수 있으며, 그러한 변화에서 자국의 이익이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냉엄한 현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2001년 9·11 테러사태로 급속히 변화한 국제질서가 다시 한번 변화하고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