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최대기업 가스프롬은 사내에 군대를 둬 정부 역할을 일부 수행한다. 가스프롬은 국영기업이고 국내외에 보안시설인 파이프라인이 많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미국의 한 순수 민간기업이 정부의 역할을 일부 수행한다. 디즈니다.
디즈니는 로스앤젤레스(LA)와 플로리다주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매년 수백만 명이 방문하는 위락시설을 운영한다. 특히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 리조트는 면적이 100㎢다. 서울 여의도의 12배다. 이 정도 토지와 설비를 운영하는 데는 지자체와 다양하고도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도로, 취수와 하수, 소방, 그리고 치안과 조세 등이다.
창업자 월트 디즈니는 LA의 시설을 운영할 때 지자체와 유기적 협조에 한계를 느끼고 플로리다에 디즈니월드를 건설할 때는 아예 회사가 자체 정부기능을 수행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황무지에 디즈니를 유치하고 싶었던 플로리다주는 그에 호응해 1967년 특별법을 제정, RCID(Reedy Creek Improvement District)라는 특별행정구역을 조성해주었다. 2개의 시를 포함한 RCID 지역에서는 디즈니가 주정부다. 이 특별법에 대해 제기된 위헌소송에서도 플로리다주 대법원은 합헌판결을 내렸다.
당초 계획엔 해당 지역에 주정부의 세금우대 금융지원으로 방대한 규모의 주거시설을 건립하는 안도 포함됐는데 창업자가 별세한 후 디즈니 이사회가 RCID를 보수적으로 운용키로 결정해 오늘에 이른다. RCID 홈페이지는 RCID가 정부와 민간기업간 협업의 모범사례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그런데 지난 4월 플로리다주 의회가 55년 만에 이 특별법을 폐기했다. 2023년 6월부로 RCID는 해산되고 주 (공화당)정부가 해당 지역에 대한 정부기능을 되찾아온다. 의외의 이유에서다. 플로리다주에서 가장 큰 고용주인(7만5000명이다) 디즈니가 '교육에서의 부모권리법'(Don't Say Gay법이라고 한다)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부 주의원이 RCID폐지법을 추진한 것이다. 주 의회에서 지난 3월 통과된 이 법은 학교에서 LGBTQ 관련 교육을 규제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보복이라고 비판받는 RCID폐지법은 하원에서 70대38, 상원에서 26대13으로 통과됐다. 이렇다 할 토론도 없었다. 법 자체는 한 페이지 분량밖에 안 돼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예측을 어렵게 한다. 한마디로 급조돼서 통과된 것이다. 사실 디즈니 경영진은 당초 부모권리법에 찬성했다. 직원들의 비판이 거세자 입장을 바꿨다.
RCID폐지법은 급작스럽게 통과됐기 때문에 그 파급효과를 두고 전망이 분분하다. 무려 10억달러의 채무가 지역민들에게 조세부담으로 전가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제 정부가 광대한 지역에 건설된 건물과 시설물의 안전관리를 맡아야 하는데 그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도 문제다. 납세자 부담으로 귀결될 수 있다.
진보진영에서는 디즈니에 플로리다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기업이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면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