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산업 경쟁력 회복을 위해 유럽연합(EU)이 뒤늦게 발 벗고 나섰다. 수년간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펼친 빅테크 규제정책이 오히려 독이 돼 유럽의 디지털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통렬한 자성에서 시작됐다. 최근 EU는 AI(인공지능) 기업 육성과 규제부담 타파를 선언했다. 지난 10일 개최된 파리 AI행동정상회의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AI 산업 규제를 간소화하겠다"고 밝히며 약 163조원의 투자를 약속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유럽 AI 육성에 약 30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하며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최근 EU는 앞으로 5년의 정책방향을 담은 로드맵 '경쟁력 나침반'을 발표했다. 지난 20년간 유럽의 산업 경쟁력이 계속 감퇴했음을 인정하고 '혁신격차 해소'를 주요 과제로 삼았다. 특히 미국,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줄이기 위해 AI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천명했다. 초대형 AI모델 훈련에 특화된 'AI 기가팩토리' 구축을 시작으로 AI산업 발전 가속화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회원국별로 상이한 규제를 통합하고 간소화하는 작업에도 나선다. EU 집행위 역사상 최초로 규제 단순화 전담 집행위원을 임명하고 기업의 행정부담을 현재보다 30% 이상 줄이겠다고 한다.
이러한 결정은 결코 즉흥적이지 않다. 통렬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됐다. 유럽은 디지털 주권을 강화하고 기술적 자립과 혁신적 생태계 구축을 위해 유로스택(EuroStack)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포괄적 의미에서 유럽형 AI 생태계 구축전략을 펼치는 셈이다. 지난 1월 발표한 보고서에선 그동안 규제 일변도로 접근한 EU의 실책을 비판했다. 강력한 규제를 통해 기대한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했고 빅테크의 서비스와 인프라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됐음을 인정했다.
이러한 인정과 결심은 지난해 9월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작성한 '드라기 보고서'에서 시작됐다. 보고서에서는 지나친 규제가 오히려 투자환경을 악화시켰고 디지털 기술발전 속도로 미국과 EU의 생산성 격차가 더 벌어졌다고 진단했다. 특히 AI 혁신이 기회며 미래기술에 대한 투자확대와 과감한 규제완화로 디지털 기술주권을 확보해야 유럽 경제재건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디지털 생태계 자생력 강화를 위한 투자와 혁신을 국가 차원에서 단행하겠다고 밝힌 점은 부러운 대목이다. 작금의 현실이 과거 잘못된 정책접근에서 기인했음을 시인하고 생태계와 후대를 위해 지금이라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유럽의 반성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EU의 규제정책에 열광하며 규제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정책 입안자들은 그 한숨에 귀 기울여야 한다. 디지털 영역에서 자국 플랫폼과 테크기업을 가진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인 한국의 디지털 생태계는 절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금은 정부의 수비가 아닌 과감한 공격과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기업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고 국내 AI 생태계가 더 건강하고 단단해지도록 정부는 든든한 지원자이자 투자자의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