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국력의 기준은 부국강병을 중시하는 '하드파워'(hard power)였다. 하드파워는 강제력으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변화시키는 힘이며 군사력, 경제력, 영토와 자원 등 물리적 힘을 기반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로마제국, 몽골제국, 오스만제국, 대영제국 등 대제국은 예외 없이 압도적 하드파워를 보유했다.
20세기 후반 세계화, 정보화, 냉전종식,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세계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군사력, 경제력 외에 문화와 외교적 영향력이 국력의 중요한 요소로 대두했다. 이것이 미국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가 제시한 '소프트파워'(soft power) 개념이다. 소프트파워란 문화, 가치, 외교 등의 매력을 통해 다른 나라가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힘이다. 강제, 압박, 물리력 대신 매력과 설득을 통해 상대 국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소프트파워의 핵심은 문화며 할리우드영화, 일본 애니메이션, 한국 K팝 등 문화산업은 소프트파워의 대표적 사례다. 문화는 국경을 넘어 파급력을 발휘했고 국가 이미지를 드높이는 강력한 무기가 됐다.
21세기 디지털 전환기에 접어들면서 국력의 기준이 또 한 번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제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요소는 '컴퓨팅파워'(computing power)다. 컴퓨팅파워는 단순한 컴퓨터 성능이 아니라 데이터를 분석하고 AI(인공지능)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데이터는 '21세기 원유'로 불리고 이를 효율적으로 처리·활용하는 능력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 AI 기술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며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분석할 수 있는 연산능력이 곧 컴퓨팅파워다. AI 가속기로 불리는 GPU(그래픽처리장치), GPU의 심장으로 불리는 HBM(고대역폭메모리) 등이 컴퓨팅파워의 핵심요소로 주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컴퓨팅파워를 둘러싼 국가간 경쟁은 점점 치열해진다. 미국, 중국, 유럽 등 주요 국가들은 반도체와 슈퍼컴퓨터 개발, 양자컴퓨팅 연구, AI 기술개발에 천문학적 예산을 투자하며 국가의 사활을 걸었다. 특히 중국은 국가 차원의 전략적 지원을 통해 AI와 컴퓨팅 분야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위협을 느낀 미국은 강력한 대중 수출규제를 통해 핵심 반도체 기술이 중국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였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근 중국 AI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는 생성형 AI 모델 R1을 출시해 파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제재 속에 단기간에 개발됐음에도 챗GPT o1, 클로드 3.5 소네트 등을 능가하는 성능을 보여줬다. 더 놀라운 것은 개발비가 오픈AI나 메타의 10분의1에도 못 미치고 게다가 고성능 GPU가 아니라 저사양 칩을 사용했으며 오픈소스로 공개했다는 점이다. 딥시크 쇼크는 알파고 쇼크, 챗GPT 쇼크에 이은 세 번째 AI 충격이라 할 만하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반도체 봉쇄에도 이런 놀라운 성과를 이룬 점에 주목하며 AI 후발주자가 저비용·고성능 AI모델을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앞으로 AI 패권경쟁이 더 격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바야흐로 컴퓨팅파워 시대로 접어들었다. 컴퓨팅파워는 국력의 새로운 기준 '뉴노멀'이 되고 있다. 한 국가의 컴퓨팅파워를 구성하는 요소로는 슈퍼컴퓨터, 데이터 총량과 데이터센터, 반도체산업 생산력, 클라우드 컴퓨팅 인프라, AI 연구·개발 투자규모, 통신네트워크, 디지털 우수인력, AI·소프트웨어 정책과 규제환경 등을 들 수 있다. 강력한 컴퓨팅파워를 확보하기 위해선 타이밍, 과감한 투자와 정책, 국민적 관심 등이 중요하다. 컴퓨팅파워 정책엔 여야도 없고 보수, 진보도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국가의 총력을 쏟아부어야 한다.